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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rry Feb 18. 2021

베풂에 대하여

시각장애, 지체 장애 등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에티켓은 도움이 필요하지 먼저 묻는 것이다. 묻기 전에 도움을 주는 것은 상대를 오히려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 도움은 상대가 원할 때 주어야 한다.


정상인들에게 은혜를 입어야 하는 수동적인 위치를 거부한다. 정상인들이 누군가에게 베풀면서 가지는 우월감을 거부한다. 칼릴지브란의 예언자에 '베풂에 대하여'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




베푸는 그대들은 어떠한가?

베풂을 받는 사람들의 가슴에 부끄러움의 못을 박고

받는 이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지는 않는가?

그리하여 수치심에 떨고 찢어진 자존심에 가슴 아파하는 아들을 보며

우월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는가?

이보다 더한 악행이 이디 있겠는가!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이 함께 교육받는 '희수자연학교'에 장애아동의 부모님이 올 때 이 구절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희수자연학교는 입학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입학에 대한 감사인사를 받을 때가 있는데 비장애부모님들 보다 장애부모님께  입학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더 자주 받는다. 그러면 나는 칼릴지브란의 말을 잊지 않으려 애를 쓴다. "당신은 법적으로 순서에 맞게 들어오신 것입니다. 제가 받아주는 것이 아닌 당신 자녀가 당연히 교육받을 권리입니다."


나는 누군가를 후훤을 할 때도 이 구절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넉넉하지 않아도 삼시세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그런 것을 당연하게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달에 10번 마시는 커피 중에서 두 번 정도는 집에서 내려서 마시고 그것으로 나눔을 한다. 당신과 나눠 마시는 커피입니다.라는 생각으로


둘째가 대학에 들어갔다. 엄마 월급이 많아서 국가장학금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인정!  국가 예산은 그렇게 공평하게 더 어려운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근로장학을 하고 싶은데 그것도 대상에 들지 않아서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딸이 말한다. "엄마 월급이 많은 건데 왜 내가 근로장학도 못하는 거야!" 성인의 된 딸의 학비는 엄마 때문에 국가 장학금을 받지 못하니 내가 냈다. 그렇다고 성인이 된 딸의 생활비까지 주지는 않는다.  딸은 치킨집 알바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국가장학금을 못 받으니 성적 장학금이라도 받아야겠다면 1학기에는 전부 A+받았고, 2학기에도 과에서 3등을 했다. 생각보다 성적우수 장학금이 크지 않지만 딸은 "국가 장학금을 못 받으니 엄마가 내 학비 내려면 힘드니까 공부라도 열심히 해서 엄마 부담 줄여줘야지!" 기특하다 '딸 고마워 그런다고 장학금 받은건 너에게 돌려주지는 않을게 ^^ '


청년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정책이 있다면 딸은 더 잘 독립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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