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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rry Oct 30. 2020

시옷과 피읖

싱글맘 엄마가 띠동갑 아들에게 훈수하기.

공익인 첫째에게 애인이 생겼다. 엄마 품을 벗어나 한 인간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귀하다. 둘의 데이트 코스로 코로나로 식당에 가지 않고 집에 와서 함께 저녁을 먹을 때가 있다. 20대 초반 동갑내기인데 결혼을 전제로 대화를 할 때는 좀 이르다 생각이 들다가도 나 역시 지금의 첫째 나이로 대학생 때 결혼을 하여 이듬해 출산을 했으니 이르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다.


띠동갑 아들을 출산한 직후 시아버님은 내게 “애가 애를 낳았네”라고 표현하셨다. 결혼 직후 기말고사를 쳐야 하니 제사에 가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철이 없는 대학생 며느리였다. ‘숟가락 두 개만 가지고 오면 된다’는 남편의 말을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서 결혼 준비로 손님맞이 잔치상과 온갖 크기의 그릇을 준비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많이 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정도로 세상 물정도 몰랐다. 결혼 후 자연스레 경제권은 남편이 가졌고, 평생 주택에서만 살아온 나는 아파트 관리비의 존재도 몰랐다. 3개월 후 현관문에 ‘단수’ 통보가 붙은 것을 보고 경비실에 가서야 관리비를 납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 정도였다.


잔잔한 표현은 하지 않아도 마음은 언제나 태평양 같던 남편의 넓은 울타리 안에서 세상 걱정 없이 살았다. 경제권을 가지지 않았으니 대출금이 얼마인지도 모르니 돈 걱정도 하지 않았고, 파트타임으로 내 용돈을 벌면서 내 하고 싶은 것 짬짬이 하고 사니 넉넉지 않아도 행복했다. 말다툼 조차 내가 일방적으로 쏘아대다가 제 풀에 지쳐 먼저 ‘자기 미안해, 사랑해’ 하고 사과하고는 다시 행복해졌다. 나는 남편에게 시옷의 한 획처럼 기대고 살았다. 그렇게 12년이 흘렀다.      


날 좋은 5월 새벽 남편은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으로 쓰러졌고 119안에서 바이탈 사인은 일직선으로 멈추고 말았다. 아빠 엄마 아들 딸 완벽한 가족이었는데 말이다. 돈 걱정, 싸울 걱정 없고 눈만 뜨면 사랑스러운 남편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행복한 아침을 맞이했는데 예고도 없이 아빠 없는, 남편 없는 '결손'가정이 되고 말았다. 행복으로 가득 찼던 내 삶의 소쿠리는 밑이 터졌다.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었다. 희망도, 꿈도 모두 터진 소쿠리 틈으로 술술술 다 빠져나갔다. 시옷의 획 하나가 사라지자 남은 획은 엎어져서 혼자서 결코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추운 망망대해에 부실한 뗏목 위에 발가벗겨진 채로 두 아이를 끌어안고 버려진 것 같았다. 나를 받쳐주던 남편의 아늑한 울타리는 더 이상 없다.      


어느 날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머릿속에서 지렁이 같은 것들이 스멀스멀 거리는 불쾌한 느낌이 들었고 참기 힘든 고통이 자주 생겼다. 혼자된 나를 돕기 위해 집을 정리하고 함께 살기로 한 친정엄마께는 차마 말을 못 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조용히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의사에게 증상을 말했다. 사별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다만 친정아빠와 삼촌이 뇌졸중이었다는 것만 알려드렸다. 가족병력이 있으니 어쩌면 충격으로 뇌에 이상이 생긴 것 아닌가 생각되었다. 검사를 시작했다. 심전도 검사와 혈액검사 등 갖은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의사는 내게 ‘건강 상태 양호’라고 말했다. 뇌 속에 기어 다니는 지렁이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온 나에게 양호라니 납득이 되지 않아 소리쳤다. “그럴 리가요 나는 아파요. 그리고 어쩌면 뇌졸중 일지 모르니 MRI 같은 거 찍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돈 낼 테니 얼른 찍어봐요” 거의 울먹이다시피 의사에게 검사를 더 하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MRI는 찍을 필요가 없어요. 병원도 찍으면 이익이지만 그럴 징후가 전혀 없어요.” 하면서 다음에 또 이런 증상이 생기거든 여기로 가라고 메모지에 적어주었다. 그 메모지에는 ‘정신과 과장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머릿속 지렁이는 뇌졸중 초기 증세가 아닌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소견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 흘러내렸다. 시옷이 하나의 획을 잃고 혼자 바닥을 기며 아프게 '으으' 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이 딱 지금의 내 모습같다. 그 후 나는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      


정신과 의사가 철학자는 아닌데 삶의 묵직한 물음을 정신과 의사에게 물었다. 혼자 남겨진 사람의 아픔에 대해 당신은 얼마나 알고 공감하느냐, 나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나면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느냐. 쏟아지는 나의 질문에 사별을 경험해보지 않은 의사의 대답이 시원 할리 없었다. 의사는 검사 용지를 주셨다. 우울증 진단 검사지였다. 객관식 질문에 어떤 답을 하면 우울증 판정을 받고 어떤 답을 하면 우울증 판정을 받지 않을지 뻔한 질문들이었다. 맘만 먹으면 우울증 판정을 받거나 혹은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우울증 판정을 받은들 그래서 약 처방을 받아 일시적으로 내 기분이 좋아지게 한들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데 기분 좋아지는 약을 먹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싶어 우울증 검사는 하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산 12년 그리고 다시 12년이 더 흘러 ‘새댁’이던 나는 이제 중년 여성이 되었다. 남편 울타리 안에서 철없이 행복하던 때 직장에서 부모 상담을 했을 때는 신랑 흉을 보거나 시댁 흉을 보는 엄마들에게 ‘사랑해서 결혼하셨으면서 왜 싸우세요. 사랑하는 신랑이 자란 시댁 가족들과 왜 불화하세요. 신랑은 사랑해야 하고 시댁 가족에게도 잘해주세요’ 라며 교과서 같은 말을 지껄여댔다. 사별 후 12년간의 엄청난 경험들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교과서 같은 말로 상담 온 엄마들에게 핀잔을 주지 않는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얕은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요즘에는 상담할 때 터져서 꿰맨 나의 상처를 들어내어 보여준다.  그러면 아픈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행복한 사람에게는 행복의 소중함을 더 깊이 느끼게 하고, 헤어진 사람에게는 공감을, 그리고 잘 안되지만 노력하는 사람에게 손 내밀어 격려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삶이 내 눈동자에 담겨 함께 웃고, 울 수 있게 되었다. 획 하나 잃어버린 시옷은 12년이 지나자 어느새 피읖이 되어 있었다. 피읖의 세워진 두 획 중에서 한 획이 무너져도 한 획은 혼자 서있을 수 있는 것처럼 나는 혼자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텃밭 동네 아주머니의 소쿠리는 12년 전의 나처럼 밑이 터졌지만 굵은 실로 한 땀 한 땀 꿰매니 오히려 더 튼튼해졌다. 이제는 무거운 것도 큰 것도 그리고 흙이 많이 묻어 더러워질까 하는 걱정 없이 이것 저것 마음껏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싱글맘 엄마는 데이트하는 첫째에게 시옷보다 피읖으로 만나라고 훈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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