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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rry Jan 19. 2022

기도를 잃었다

'수도자의 기다림' 58p  백승미 글  명중 중에서 

  디모데처럼 할머니와 어머니의 기도로 자랐다. 결혼 전까지 제사 한 번 본 적 없는 3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모태신앙이다. 남편은 믿음의 가정은 아니었지만 신앙 생활을 전제로 결혼했다. 남편과 주일마다 손잡고 예배드리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고 하는 사업도 안정적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행복했고 마치 믿는 집이 잘 된다는 것은 나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삶은 평탄했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 12년 어느 새벽, 남편은 심장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남편만 살려주시면 아무것도 바랄 게 없습니다. 평생 어떤 소원도 없습니다. 제발 우리 자기를 살려주세요.”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119로 이송하여 응급실에서 심장충격기를 해도 남편의 심장은 다시 뛰지 않았고 40세 짧은 생을 마감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자기야 사랑했어, 당신과 함께여서 너무 행복했어’라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당황하며 울부짖은 것이 남편에게 한 나의 마지막 인사였다. 


  내 생의 가장 간절한 기도는 거절당했다. 내 평생의 모든 소원을 모아 남편의 목숨과 바꾸자는 거래에 하나님은 응하지 않으셨다. 온갖 축복의 대명사 같은 내 삶은 서른다섯에 혼자가 된 저주의 아이콘이 된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기도를 잃었다. 남편의 죽음 이후 기독교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한국 기독교의 관념보다 좀 더 다른 각도를 경험했다. 그리고 거기서 오는 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찾다가 더플랜 훈련에 이르렀다.


  믿지 않는 시댁에서는 남편 죽음의 원인을 ‘건축하던 땅에 있던 묘를 잘못 이장해서 그렇다. 새로 지은 집 벽지에 맹수가 그려있어 개띠인 남편보다 세서 그렇다.’ 등의 이유를 말했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한 헌금이나 서원한 것을 드리지 않은 것이 있느냐, 목사에게 잘못한 것이 있느냐.’ 묻는다. 나의 무슨 실수가 하나님을 노하게 했는지 어떤 신을 노하게 했는지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 많은 이유를 톺아보며 남편을 죽게 한 원인을 찾고 또 찾았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하나님께 미움받았거나 또는 알 수 없는 신에게 천벌받아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것이 되었다. 사랑을 잃고 혼자 남겨진 외로움에 너무 사랑받고 싶어서 재혼을 했으나, 그것으로도 마음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신에게 잘못 보이면 천벌받는 이 논리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회복된 듯하다가도 한 번씩 올라오는 슬픔과 분노가 반복되어 오랫동안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친구인 목사가 어느 날 전화하며 위로했다. “하나님이 너한테 너무 하셨다. 하나님 정말 싸가지 없다.”라고 말하며 위로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아마도 목사인 그 친구는 하나님께 양해를 구하고 내 수

준의 언어로 나를 위로한 것이었으리라.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러 간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신부에게 성화판을 밟으라 한다. 심지어 성화를 밟지 않으면 참혹한 고문이 기다리는데 그 고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그 신부가 전도한 사람들이 배교를 하지 않기 위해 고문당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성화를 밟기만 하면 지금 고문당하는 사람들을 살려준다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가장 괴로운 사랑의 행위”라고 말하며 말이다. 내가 신부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소설에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밟아도 괜찮다. 너의 발은 지금 아플테지.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들의 그 아픔과 고통을 나누어 갖겠다. 

그 때문에 나는 존재하니까.’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목이 메여왔다. ‘싸가지 없는 하나님, 나한테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라고 소리치며 몸부림치는 나를 보시며 배신했다고 다그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괴로워하시는 주님을 느꼈다. 나를 욕해도 괜찮단다. 불면 날아가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넉넉히 이해하시고 함께 괴로워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싸가지 없다고 목사가 말하기 힘들었을 터인데 나의 약한 신앙을 배려한 그의 위로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 같은 내 인생을 향한 통쾌한 한 방이었다. 


다른 신에게 싸가지 없는 하나님이라고 했다면 나는 다시 천벌을 받았을 테지만 나약한 나의 아픔을 공유하시며 배신하는 내 모습조차 괜찮다 하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는 비로소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예수님의 성화를 밟듯 싸가지 없는 하나님을 실컷 욕하면서 나의 신앙은 바닥에서 조금씩 올라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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