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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정의 얼굴

by 이종준

나이 마흔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는 나이라고 한다.

얼굴은 아침저녁으로 씻고 닦고 찍어 바르며 매일 본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본 적이 언제였더라? 나이 마흔이 넘은 남자라 여드름을 짜던 시절 말고는 기억이 없다. 벌써 사십하고 다섯, 사오정이 되었다. 참 열심히 살았는데... 회사가 부도나고 문을 닫으면서 원하지 않은 사오정四五停이 되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 탓에 재취업은 쉽지 않았고 실업자 생활은 6개월을 넘어가고 있다.

거울 앞에 서서 십 여분 얼굴만 뚫어지게 보았다.

낯설다, 이 얼굴! 괴괴한 기운이 얼굴에 단층처럼 쌓이고 있었다. 흰 머리카락, 주름이 늘었고 전에 안 보이던 점들도 생겼다. 문득 이 얼굴을 한번 그려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손재주도 형편없고 고등학교 졸업 후엔 낙서 몇 장 끄적거린 것 말고 무엇이든 제대로 그려본 기억이 없었다. 또 비록 밀려난 사오정四五停이지만 자꾸 뒤돌아보며 지난 과거를 후회하는 기분이 들어 싫었다. 아직 앞으로 나아갈 나이지 뒤돌아 볼 나이는 아닌 것이다.

그래, 그래도 한번 그려보자. 잘났던 못났던 내 얼굴이나 제대로 한번 그려보자!

어질러진 책상 위를 치우고 받침이 있는 작은 거울을 올려놓고 4B 연필을 깎았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스케치북을 찾아 꺼냈다. 도화지를 한 장 뜯어 칼로 윗면을 잘라 반듯하게 만들었다. 뭐든 반듯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직사각형의 하얀 세계가 바로 내 눈앞에 펼쳐졌다.

뭐부터 그리지?

아무것도 없는 하얀 도화지엔 뭔지 모를 막막함과 갑갑함이 있었다. 텅 빈 공간에 첫 점을 어디에 찍어야 될지 몰랐다. 그건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뇌가 그려내는 생각과, 그 생각을 옮기는 연필과, 연필을 받아들이는 공간의 황금분할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만들어질 창조의 착점着點이 중요했다. 머뭇머뭇 계란처럼 생긴 둥근 원을 슬쩍 그렸다. 연필이 도화지 위를 지나자 공간이 나뉘고 경계가 생겼다. 선線은 안과 밖을 만들어 전혀 다른 성질의 면面으로 공간을 나누었다.

‘우주알’

텅 비고 새하얀 공간에 처음 생긴 창조물을 나는 ‘우주알’이라 부르기로 했다. 나는 사람이 소우주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인 원자原子도 둥글고, 계란도 둥글고, 별들도 둥글다. 모든 창조물의 원형原形은 둥글기에 우주알도 둥글다. 우주알은 위가 좀 넓고 아래가 약간 좁다. 세워놓은 계란처럼 생겼다. 그 밑에 작은 타원을 하나 더 그렸다. 그러자 우주알은 계란형 얼굴이 되고 작은 타원은 목이 됐다. 목 뒤로 어깨선을 연하게 그렸다. 흐릿하지만 사람의 윤곽이 나왔다. 낯설고 서툰 손짓에 선들이 존재의 틀을 만들었다.

사오정, 귀를 먼저 그렸다.

다른 기관들은 선線 안에 있는데 귀만 선線밖에 있다. 우주알 양 측면에 오분의 일 크기의 나비 모양을 반으로 잘라 나눠 달았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란 구절도 있지만 누구나 태중胎中의 첫 감각은 ‘소리’였다. 처음 들었던 어머니의 음성은 자기만의 본능이 되어 핏속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오른쪽 귀를 그리면서 아버지를 생각했고 어머니는 왼쪽에 모셨다. 거울에 비친 귀는 오른쪽이 조금 작아 보였다. 실제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키가 작다. 오른쪽 귀를 조금 작게 그렸다. 귓불의 두께는 똑같이 했다. 다만 왼쪽 귓바퀴를 좀 더 두툼하고 둥글게 그렸다. 귀가 한쪽만 있었으면 그리기 어려웠을 텐데 둘 다 있어 수월했다. 두 귀 덕분에 가난했지만 굶지는 않았다. 길조심 하란 말씀은 달팽이관을 타고 아직 계속 돌고 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귀를 그리고 나니 사람 얼굴 모양이 또렷해졌다. 귀는 우주알의 밖이라 부담이 없었는데 안으로 그림을 그리려니 영 중심이 안 잡혔다. 아무 생각 없이 정중앙에 코 삼아 선 하나를 살짝 그었더니 중심中心이 잡혔다. 그래, 코를 나로 삼아야겠구나!

하지만 코보다 먼저 그린 것은 눈이다.

조선시대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서 살아있는 눈 덕분에 그림 전체가 살아있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오른쪽 눈을 그리는데 형님이 생각났다. 장남노릇에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서 실제보다 좀 더 둥글게 넉넉한 기분으로 그렸다. 왼쪽 눈은 나이가 들어도 어머니와 싸워 막내티를 내는 아우님 생각에 눈꼬리가 살짝 길어졌다. 그놈의 성질머리 하고 정말 ‘딱’이다. 눈동자는 진하게 반달모양으로, 눈빛은 착해 보이도록 그렸다. 눈을 다 그리고 보니 두 눈은 똑같았다. 두 눈의 미세한 차이는 내가 아니면 알 수 없다.

만화에 나오는 사오정은 눈썹이 없다.

나는 있다. 눈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눈썹이니 아예 눈썹 하나는 형수, 하나는 제수씨로 삼기로 했다. 거울을 보니 오른쪽 눈썹은 진하지만 약간 짧고, 왼쪽 눈썹은 연하지만 조금 길어 보였다. 눈썹은 양쪽 눈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줬다. 눈썹을 그리고 나서 얼굴 전체를 보니 훨씬 편안해졌다. 됐다. 역시 눈에는 눈썹이 제 짝이다.

가난한 집안에 함께 나서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보며, 함께 늙어가는 동기간이 있다는 것도 고맙다. 형제 모두 사십 년 넘게 무탈하게 살고 있는 것도 다행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또 세상을 헤쳐 갈 것이다. 오른쪽 눈에 쌍꺼풀을 달았다. 아, 너무 예쁜 쌍꺼풀! 왼쪽 눈에는 쌍꺼풀이 없다.

그리는 것은 입술이지만 정작 입으로 불려진다.

윗입술은 조금 얇게, 아랫입술은 도톰하게 윤곽선을 그렸다. 윗입술이 살포시 아랫입술을 덮고 있는 모습이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적당한 크기다. 입 꼬리는 살짝 올렸다. 이렇게 생긴 입으로 첫 키스를 하고 뽀뽀도 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했구나. 웃으며 맛있는 음식도 같이 먹었구나. 집사람이 생각났다. 입 꼬리를 조금 더 올렸다.

꼭 다문 입안에 치아들이 있었지만 그 공격성을 드러내 보이긴 싫었다. 그냥 입만 그렸다. 거울에 비치는 입보다 더 깔끔하게 그렸다. 가끔은 잔소리도, 화난 소리도 나왔지만 토를 달지 않고 살아줘서 고맙다. 드러내거나 앞서지 않고 필요할 때 좋은 말을 많이 해서 더 고맙다. 그냥 사랑한다.

사오정은 콧구멍만 있다. 난 잘생긴 코가 있다.

사람이 숨 쉬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숨 한번 쉬는 것은 온 우주를 들여 마시고 내뱉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얼굴의 중심에 잘 자리 잡아 주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드러나지 않는 것이 꼭 재차再次인 나 같다. 코끝이 살짝 매부리 코 같이 생겼다. 다시 봐도 끝에서 약간 휘어졌다. 높이와 크기는 적당한데... 코에 재복財福이 있다는데... 재복도 비뚤어진 것 같아 아쉬웠다. 그냥 쭉 뻗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만하면 잘생긴 코다.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있어 다행이다.

눈, 귀, 코, 입을 그리자 주변의 것들을 속도가 빨라졌다.

턱은 살이 붙어 입 밑에 선 하나를 그리고 손으로 반원으로 뭉개서 흔적만 나타냈다. 그게 좋다. 양쪽 턱 선은 찐하게 V자로 그렸다. 머리숱은 꽤 있지만 나이가 든 만큼 이마 끝으로 밀려나 있었다. 흰머리도 꽤 생겼다. 흰머리를 볼 때마다 이젠 만나기 힘든 얼굴들이 떠올랐다. 도화지에는 검은 선만 자꾸 만들었다. 잔주름은 그리지 않았다. 인상을 쓰기 전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입 옆에 살짝 생긴 팔자주름도 덤덤히 모른척했다. 내 그림 속엔 이제 걱정이 없다. 목과 어깨선을 두껍게 하는 것으로 그림이 끝났다.

그럭저럭 그림은 완성했지만 꼴이 형편없었다. 인물화를 기대했는데 추상화가 됐다. 고호의 자화상을 생각했었는데 피카소의 그림처럼 눈, 귀, 코, 입이 따로 논다. 잘 못 보면 정말 어린이 만화에 나오는 사오정沙悟淨 같았다.

하지만 내가 그린 얼굴에는 이상李霜의 자화상처럼 깊은 외로움이거나 병적인 우울은 없다. 내 그림은 코가 귀와 잘 어울려서 좋았다. 눈과 입과 머리가 잘 어울리고 얼굴의 모든 것 함께 모여 있어서 그냥 좋았다. 약간 삐뚤삐뚤하게 그려졌지만 크게 어긋나진 않았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다. 하지만 어떠랴? 사십 오 년, 잘 걸어오다 잠시 비틀거리지만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형제 동기간에 잘 지내고 아내와 서로 아끼며 살고 있고 오늘 아침도 잘 먹었다.

나는 오늘 사오정四五停의 얼굴 속에 숨어있는 청복淸福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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