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극장 6번 출구

by 이종준

11월 첫 날. 소극장 6번 출구에 앉아 있다. 점심을 먹으러 간 배우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소극장 6번 출구! 여긴 객석이 꽉 차도 백 명이 되려나? 낯설지 않고 느낌이 새롭다. 아무것도 없는 이 자리에 다시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십 년 전, 젊은 종준이는 오후 내내 한삼을 손에 쥐고 탈춤을 췄다. 다음 날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걷는 연습을 하루 종일 했다. 무용을 배우며 안 쓰던 근육에 힘을 줄 때마다 경련이 일어났다. 밤이 되면 라면을 끓여 먹고, 공짜 초대권을 들고 다른 소극장 공연을 쇼핑하듯 보러 다녔다. 뭣도 모른 채 이리저리 우루루 몰려 다녔다. 주머니에 동전 몇 개 밖에 없었어도 친구들이 다 비슷비슷해서,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젊음은 선택의 순간과 맞부딪치는 경우가 많다. 그에게도 뭔가 결정을 해야 되는 시간이 찾아왔다. 이번 갈림길에서 그는 유달리 많이 헷갈려 했다. 이쪽? 저쪽? 연습이 끝나고 라면 국물만 남은 작은 술자리에서 선배 중 누군가 말했다. 먹고 살려면 연극 말고 인쇄 일을 해야 한다고. 연극을 하면 남들처럼 못 산다고. 이 길은 먹고 살기 힘든 길이라고 했다. 숨이 턱턱 막힌다고 했다. 결국 그는 먹고는 살기 위해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스물 두해 먹고 살았다. 살림살이는 그때보다 좀 나아졌다. 정말 잘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길로 갔던 그가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지금도 그때처럼 불안하다. 앞으로 먹고 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젠 그때처럼 헷갈리지 않는다. 텅 빈 소극장에 내내 앉아 있는 시간이 좋다. 옛날엔 그것만으론 부족했지만 이젠 그거면 된다. 그 동안의 경험들이 답을 줬다.

소극장 무대는 작고 좁다. 작은 小극장이니까. 아무리 작은 움직임도 객석에서 다 볼 수 있다. 바닥과 천장은 온통 검은 색이다. 불을 끄면, 암전이 되면, 한 발자국 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천장에 종처럼 매달린 조명장치에서 나오는 빛만이 이 무대 위, 유일한 빛이 된다. 배우는 그 빛을 받고 산다.

“점심 식사는 하셨습니까?”

막내 광록이가 들어오며 씩씩하게 인사를 한다. 젊고 아직 군대도 안간 친구다. 넘치는 힘과 맑은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시기를 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진 시간과 광록이의 시간은 다르다. 물리적 양은 같지만 화학적 내용은 다르다. 오늘 하루도 저 친구의 시계는 더디 더디 가고, 내 시간은 빨리 빨리 지나간다. 누가 말을 안 해도 오전 연습에 어질러진 소극장을 치운다. 밀대를 민다. 자기는 군대도 가야되고, 학교도 졸업해야 되고, 취직도 해야 되고, 새로운 여자 친구도 사귀어야 되고,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한다. 그는 보이지 않은 미래의 일을 한꺼번에 모아 미리 걱정한다. 저땐 누구나 저렇지... 콧노래를 흥얼대며 밀대를 미는 광록이 모습에 젊은 그가 숨어 있다. 광록이는 지금 생에서 황금같이 빛나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십년쯤 흐른 뒤에, 어쩌면 광록이도 낯선 곳에서 지금 이 순간과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꼬박 8시간. 작고 어두운 소극장 6번 출구에서 배우들의 연습이 한창이다. 그걸 구경하는 나도, 내 옆에 앉은 젊은 종준이도 다시 행복해 졌다. 준비하는 작품은 창작 뮤지컬 얄개시대! 오늘 모인 배우는 일곱. 무대의상인 교복을 멜빵 가방에 맞춰 입어 본다. 이번 공연에 사용할 음악이 늦게 나왔다. 그러자 안무가 늦어졌다. 조명 순서가 바뀌었다. 배우들이 움직이는 동선과 호흡이 달라진다. 작품은 끊임없이 바뀌고, 변하고 조절된다.

“공연이 보름 밖에 남지 않았는데 큰일이네?”

라고 했더니 무대에 선 경험이 많은 문수가 아직 보름이나 남았다고 했다. 날밤을 새면 연습시간은 한 달로 늘어난다고 한다. 저걸 경험이라고 해야 되나? 관록이라고 해야 되나? 그냥 개기는 거라 해야 되나?

관객의 눈길 없는 소극장! 배우들에겐 정말 편안한 공간이다. 바닥에 드러누워 소리를 내지르는 친구. 구석에서 줄을 그어가며 대본을 보는 친구. 계속 혼자 웅얼웅얼 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배우. 서로의 동선을 확인하며 동작을 맞추는 친구. 이렇게 모두 다 따로 놀지만 이들이 만들어야 할 작품은 하나다. 대본, 음악, 조명, 무대장치, 배우, 관객, 무대 뒤 보이지 않는 스탭까지. 모든 구성요소가 유기적으로 조합되어 작품이 완성된다. 무대 전체와 안 맞으면 정해졌더라도 조명을 바꾼다. 음악이 안 맞으면 계속 수정작업을 한다. 공연 중에도 애드립은 계속 바뀐다.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부족하면 어디든 끊임없이 손을 댄다. 관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 마지막 무대 인사를 하기 전까지 동선을 바꾼다.

배우들이나 스탭들의 실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연初演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쏠쏠하다. 첫 공연이 끝나면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배우들끼리 남아서 리허설을 한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열심히 다음 공연을 준비한다. 공연 중간쯤이 되면 다들 조금 심각해진다. 잘못된 곳과 바꾸어야 할 곳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공연은 중간쯤 와 버렸다. 동작이 몸에 익었다. 표정들이 굳어져 있다. 그렇지만 무대 위에선 오직 연습한대로 열심히 할 뿐이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마지막 날 공연은 다른 날보다 언제나 많은 박수를 받는다. 그동안의 공연으로 동작이 몸에 붙어 훌륭한데다 마지막이라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최후의 커튼콜이 끝나면 무대 뒤에서 배우들이 서로에게 수고 했다고 박수를 치며 악수를 나눈다. 그때야말로 원안 작품 하나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관객들이 다 나가면 배우들이 분장을 지우고 다시 무대 위로 나온다. 말없이 무대 장치를 치운다. 청소를 한다. 큰 소품은 무대 설치 팀이 해체하지만 웬만한 것은 직접 치우며 정리한다. 연극이 끝난 후 무대 위에는 철수 작업을 하는 배우들이 있다. 여섯 달 전에 기획되어 대본이 나오고, 배우가 붙고, 음악이 나오고, 조명을 맞추고, 동선과 소품을 만들고... 연습하고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뒤집히고. 길고 길었던 탄생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제대로 된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었다. 배우가 바뀔 수도 있다. 음악이 달라질 수도 있다. 안무가, 조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원작은 흔들리지 않는다. 단단한 작품은 그렇게 만들어 지는 것이다.

창고에 짐을 풀고 모두 쫑파티를 하러 간다. 그때쯤이면 옆에 앉은 이가 누구든 상관없다. 세대가 달라도, 처음 봐도, 맡은 파트가 달라도, 누구라도 수고했다며 빈 술잔은 채워준다. 옆에 있는 이가 혼자 마시지 않도록... 나도 옆자리에 앉은 젊은 종준이에게 한잔 채워 준다. 그동안 산다고 고생했다. 한잔하자! 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오정의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