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것이 불교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생사生死를 자재自在하는 것! 불자들이 정진해서 이룩해야 할 목적입니다. 생사를 자재하고 죽음 벗어나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묘법妙法입니다. 그리고 죽음 문제를 해결하고 보면 죽음이 본래 없더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남명南溟스님
“스님, 여여如如하십니까? 오랜만에 문안問安입니다!”
또 쓸데없이 부른다고 야단이겠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눈 밝은 스승을 일찍 만났으니 이번 생生은 운이 참 좋다. 스님의 법명法名은 삼묵三黙, 대천大天, 남명南溟 등이었고 속명俗名은 한기명이다.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온정리에서 1913년 태어나셨다. 말년에 부산과 광주를 오가며 활동하셨고 1999년 5월 28일 경북 울진 신계사에서 세수 86세로 입적하셨다. 순천 선암사에 오랫동안 주석하셨다. 스물넷 청년은 연세 일흔일곱의 스님을 만나 거의 한해를 한방에서 같이 먹고 잤다.
“금칠金漆우상偶像에게 머리 숙이기 싫습니다.”
첫날, 혈기 넘친 머리를 빳빳이 세우자
“그럼 운동 삼아해라.”
그렇게 시작했던 백팔배百八拜를 요즘 아주 잘 써먹는다. 살이 좀 쪘다 싶으면 아침, 저녁으로 절을 한다. 뱃살 빼는 운동으로 그만이다. 주변이 어수선하고 시끌시끌할 때도 절을 한다.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단순, 반복, 빨리한다. 백 여덟 번 무릎을 굽혔다 펴면 뭔가 정돈이 된다. 이젠 번쩍번쩍 금빛 대불大佛앞에서도 예전의 시비是非 간곳없이 열심히 머리를 조아린다.
스님은 축시丑時에 일어나 예불을 하고 아침 공양시간이 되기 전까지 글을 썼다. 오늘 쓰는 글은 어제 재워놓은 먹물을 사용했다. 난 옆에 앉아 다음날 쓸 먹을 갈았다. 한 시간 넘게 같은 자세, 같은 방향으로 먹을 가는 그 단순함이 처음엔 지겹고 힘들었다. 하지만 채 석 달이 가기 전에 나는 먹을 갈면서 다른 것도 함께 갈고 있었다. 먹물이 짙어질수록 나도 진득해졌고 모든 게 단순해졌다. 오로지 ‘쓱, 쓱’ 먹 가는 작은 소리만 세상에서 제일 중요했다. 먹이 도는 방향으로 지구가 돌고 온 우주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먹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하자 낙관落款을 맡겼다. 먹물 가득 머금은 붓이 새하얀 한지 위를 달리면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그 시작과 끝에 붉은 낙관을 찍었다. 어느 날 문득 보니 글보다 조금 밑에 있는 낙관 하나 덕에 글 전체가 겸손해 보였다.
“방안에 묵향墨香 그윽하고 낙관은 선명하네. 자넨 어떤가?”
“좋습니다.”
“좋지? 좋지? 이 좋은 날 곡차曲茶 한잔하세!”
스님이 곡차曲茶 한 잔 할 이유는 무궁무진했다. 방문객이 많아 낙관을 많이 찍은 날은 술병 무게가 훨씬 가벼워졌다. 날마다, 날마다 좋은 날들이었다.
스님을 마지막으로 뵌 곳은 경기도 목우사牧牛寺였다.
“수하 계류水何溪流라!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와 일을 물처럼 여기고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는 길만 열어주게. 그럼 자네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당당해질 수 있네.”
“삼계여 박三界旅泊이라! 항상 세상은 머물다 가는 곳이라 생각을 하며 살게. 머물다 가는 곳에 내 것, 네 것이 어디 있나? 머무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 집착이 없어질 것이네. 집착이 사라지면 죽음조차 별것이 아닌 걸 알게 될 것이네.”
“견해 불견見解不見이라! 봤는데 못 본 것은 또 무엇인가? 이걸 항상 옆에 끼고 살게. 다 써먹어 너덜너덜 해 지거든 다시 날 찾아오게. 나야 죽 든 살든 선암사 무전에 있을 것이네.”
스님, 그 견해 불견見解不見! 지금도 잘 써먹고 있습니다. 어느 해 늦여름이었지요. 승주 선암사 무전 툇마루에 스님과 제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조계산曹溪山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지요. 살랑살랑 뒷산에서 불어 온 바람은 시원했고 저는 살짝 단잠이 들었습니다. 힘 빠진 매미소리만 마당에 가득했습니다.
“조계산曹溪山... 볼만 하지?”
“예. 스님.”
“하운 다기봉夏雲多奇峰이라! 참 좋지?”
“예, 스님.”
스님은 여전히 눈을 감고 비스듬히 누운 채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자네를 내가 알지! 제대로 알지.”
그 말씀에 전 몸을 세워 툇마루 끝머리에 걸터앉아 하늘을 봤습니다. ‘하늘이 스님을 닮았구나.’ 생각만 했지 그때, 평생 지워지지 않을 큰 빚이 생겼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 여름 그 자리, 그 하늘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젊음은 뭐 그리 분주한 지... 그 후에도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막 달려가던 제 뒤엔 늘 스승님이 웃고 계셨지요. 이래도 ‘허허!’ 저래도 ‘허허!’
스님! 스승님!
꿈에라도 한번 다녀가시지요. 승주 선암사 무전 툇마루, 거기에서 한번 뵙고 싶습니다. 말없이 앉아 하회탈처럼 웃고 계셔도 좋고, 곡차曲茶 한잔하시고 평양 박치기를 해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처럼 툇마루에 앉아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가는 구름만 쳐다봐도 좋겠습니다. ‘먹 제대로 되려면 한참 멀었다.’ 한소리도 듣고 싶습니다.
정갈한 소반小盤위에 차茶 한잔 맛있게 다려 올리고 일 배一拜, 일 배一拜, 일 배一拜, 절 세 번 천천히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스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때 그 하늘에 진 빚, 조금이라도 갚고 싶습니다.
스님! 정말 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