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지슬’을 봤다.
지슬은 제주도 말로 감자다. 영화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다. 지슬은 영화로 표현된 제의祭儀요 위령제慰靈祭였다. 가슴이 아련해지는 영화다. 이야기는 하늘에서 시작된다. 오랫동안 봉인된 채 외면당하고, 이리 차이고 저리 밟혔던 이들의 운명이 운해雲海 뚫고 섬 제주로 내려온다.
“1948년 11월 미 군정하의 당국은 제주 섬에 소개령을 내렸다. 해안선 5km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신위神位
흑백영화로 무채색 회색조가 영화의 느낌을 잘 전달한다. 흑백영화... 검거나 희거나, 죽거나 살거나, 빨갱이 거나 진압군이거나, 이렇게 극단적 이분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내가 틀렸다. 상극相剋의 두 이미지 사이에 여백餘白이 있었다. 모진 세월을 산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사이를 메웠다. 무겁고 답답한 이야기였지만 영화 속 장면은 수묵화처럼 담백했다.
지슬은 닫히고 갇힌 섬 속, 살아남기 위해 움직여야 했던 작은 점點들의 이야기다. 거칠었던 삶이 한 점點으로 찍히고, 점들의 사연을 모아 이야기 선線을 만들었다. 그 선들이 얽히고설켜 아프고 쓰린 역사의 장면場面이 되었고, 그 면面 그대로 영화 필름에 옮긴 것이 ‘지슬’이다. 우리나라 영화지만 한글자막이 있다. 자막이 제주 방언의 현장감과 사건의 특성을 더 잘 살렸다.
신묘神廟
지슬은 시작부터 시각의 충격과 의식의 충돌을 함께 일으켰다. 지독한 연기 속에 널브러지고 뒤집힌 제기祭器가 나오고, 자신들이 죽인 여자 옆에서 사과를 나눠먹는 군인들이 나온다. 빨갱이라고 하면 무조건 다 죽여야 하는 상사, 졸병들에겐 악독하지만 상사의 명령에 충실한 선임 상병. 폭도를 한 명도 못 잡아 한겨울에 벌거벗은 채 기합을 받고 있는 일병. 진압명령과 손톱만 한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병사들... 그리고 물허벅을 맨 정길이 나온다. 정길? 바른 길? 나는 정길의 시선에 주목했다. 물 긷고, 돼지를 잡고, 강간하고 있는 상사 옆에서 마실 물을 떠받치고 명령을 기다리는 권력의 시종이 정길이다. 상사는 끊임없이 정길을 찾는다. 동굴 속, 마른 고추를 태워 저항하는 피난민들을 바라보던 정길이 고개를 든다. 결국 직속상관인 상사를 솥에 가두고 삶는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절대 권력을 향해 무덤덤하고 무표정한 정길이 대답을 한다.
“이제 그만 죽이세요.”
‘지슬’은 토벌대 안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명령에 죽고 산 군인들에게도 자리를 내주며 그들을 품는다.
총알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튼튼한 말다리를 보면서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죽음 앞에 있는 자신보다 굶고 있을 도새기(돼지) 걱정을 하는 원식이 삼촌의 순박함에 애정을 느꼈다. 죽어가면서도 자식을 위해 불타는 감자를 품에 안은 어머니. 그 뜨거운 감자를 찾고 통곡하는 아들. 그 한 서린 감자를 나눠 먹고 잘 먹었다는 인사를 챙기는...... 하~아! 그 일상성日常性에 나는 멍해졌다.
음복飮福
영화 지슬은 제주 4.3 사건 속에서 개인의 생각, 판단기준은 무시되고 집단의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이들과 살기 위해 숨어야 했던 이들, 그들이 모두 함께 머물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마련했다. 한국영화 최초로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깊이 있는 서사와 더불어 시적인 이미지까지 ‘지슬’은 모두를 강렬하게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라는 심사평을 들을 정도로 장면 하나하나가 대단히 아름답다. 사람이 죽어 부드러운 산 능선으로 돌아가고 하늘의 별자리에 모셔지는 장면은 황홀하다. 동굴 속 피난민들은 옹기종기 모여 떠드는 장면은 오히려 따사롭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이 확대된 화면은 그대로 영정影幀이 되었다. 용눈이 오름에서 촬영된 포스터 한 컷은 영화의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다. 지슬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영상과 상징적 의미까지 함께 맛볼 수 있는 좋은 영화였다.
소지燒紙
연청색 바다, 붉게 떠오르는 성산 일출, 오름의 누런 갈대, 눈 덮인 한라산, 형형색색의 올레... 그리고 지슬! 나는 이제 제주의 경치에 ‘지슬’의 애잔한 아름다움을 더해야겠다. 오랜 세월 뜨거운 감자였던 제주 4.3 사건, 64년 전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진한 향내를 내뿜었고, 그 향이 포근하게 내 가슴에 배였다. 아픔을 덤덤히 드러내 보이기만 하는 ‘지슬’만의 문법이 소중하고 고마웠다. 지슬은 13만여 명 관객이 함께 한 씻김굿이었다.
제주에 내 길이 있다. 제주 서쪽 해안 끝에서 남쪽 해안 초입까지 곧게 뻗은 아스팔트 길. 모슬포에서 송악산으로 이어지는 최남단 해안도로다.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올레는 아니다. 고즈넉이 은륜銀輪을 즐길 수 있는 조용한 곳이다. 2005년, 제주 해안을 따라 도는 자전거 여행을 할 때 이 길을 만났고, 내 길로 삼았다. 그 길을 따라 쭉 달려가면 강정마을이 나온다. 그땐 두 바퀴로 무심히 지나쳤을 구름 비바 위... 제주 해안마을 강정에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