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의 이별

by 에원

지금까지 읽었다면, 나에게 피아노 학원이란 의무적으로 가는 공간, 그렇게 힘들지도 않지만 그렇게 좋지도 않고. 재미는 있지만 가기는 싫은, 누구에게나 어쩌면 당연히 있을법한 공간으로 상상될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그곳에서 인간관계를 맺고 좋고 나쁜 행동들을 했으며, 피아노를 배웠고, 그렇게 점점 그 속에서 성장해 나갔다. 지금 생각했을 때 그 경험이 나에게 좋았다, 나빴다고 단정 짓지는 못하겠다.
실제로 내가 기억하는 이 일화들은 1~2년 정도의 시간에서 굉장히 인상 깊은 순간들이었다. 진짜 옛날 일이므로 나는 정확하게 모든 것을 기억하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사실 인상적인 몇몇 순간들로 나의 그 시간이 행복했는지는 잘 모를 것 같다.

내가 이렇게 회상을 했을 때,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든 느낌을 받거나 그런 불편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 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던,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경험이고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때의 추억이란, 그냥... 음, 행복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오버하는 감이 있는 재미있는 일화. 또는 그냥 ‘그랬던 과거’. 이 정도다.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는 딱히 띄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약 모든 게 긍정적이고 행복했다면 내가 지금 연주하는 것은 바이올린이 아니라 피아노였을 것이다. 내가 7년 동안 사귄 악기는 바이올린이 아닌 피아노였겠지. 그리고 나는 오케스트라에도 퍼스트 바이올린이 아닌, 주로 피아노 연주하는 아이들이 같이 병행하는 더블베이스를 연주하고 있었을지도.

(피아노는 오케스트라 악기가 아니기 때문에 피아노로 오케스트라에 들어올 수 없다. 학교 오케스트라에서는 콘트라베이스, 더블베이스랑 금관 같은 악기들은 악기를 주고 가르쳐주는데, 대부분 피아노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연주하고 피아노 반주가 필요할 때 반주를 연주한다)

내가 지금까지도 바이올린이란 엉뚱한 현악기를 연주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피아노를 너무 못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너무' 못하진 않았을 거다. 아마 어릴 때부터 '못한다'라고 생각했던 게 쌓이고 쌓여 누적이 되고, 현재는 내가 피아노를 아예 연주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을 만들게 된 게 아닐까. 만약 내가 피아노를 더 열심히 했다면 엄청난 재능을 발견했을 수도?ㅎㅎ


다시 냉정하게 말하여지면, 피아노를 별로 잘 못했다. 그냥 나에게 잘 맞는 악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학원이 잘 안 맞았던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음악' 이란걸 난생처음 배우는 단계에서 이미 질려버렸을 수도 있다. 제일 마지막 것이 가장 그럴듯한 게, 나는 박자 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연주를 할 때는 그냥 연주를 하는 거지, 박자를 꼼꼼하게 세면서 연주하지 않는다. 이러면 안 되기는 하지만, 감으로 한다.


당연히 시작할 때 박자를 세는 이런 것을 몸이 기억하게 만들면, 앞으로 연주를 할 때 크게 의식하지 않아도 그게 된다. 그래서 당연히, 피아노 학원에서는 ‘박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곱 살 아이에게 박자를 가르쳤다.


당연하지. 일단 온음표가 몇 박인지 알고, 저게 레인지 미인지를 알아야 악보를 읽고 연주를 할거 아닌가.


그렇지만 음악 이론은 누구나 알듯, 정말 매우 엄청나게 지루하다. 물론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해 주셨다. 나는 금세 온음표가 ‘파인애플’과 같이 네 박자로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 음표는 ‘배’, 저거는 ‘사과’, 저거는 ‘바나나’.


저거는 도, 저거는 레. 저 쉼표는 ‘사과’ 만큼, 즉 두 박자를 쉰다. 색칠공부도 했다. 주어진 음표를 보고 동그라미를 한 개, 두 개 색칠했다.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그랬던 것 같다.



아마도 그런 이론 공부에서부터 내 흥미는 멀어지지 않았을까. 뭐, 곡을 치기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흥미를 어느 정도 되찾았겠지. 그래서 연주를 했다. 그렇지만 두 번째 문제가 있었다.




나는 지금 현재 낮은음자리표를 전혀 읽지 못한다. 읽을 필요도 없다. 바이올린은 높은 음자리표,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음자리표를, 그 음자리표 ‘만’ 쓴다. 높은음 위주인 바이올린은 그 안에서 덧줄을 그리며 올라간다면 올라가지, 내려가서 가온음자리표가 되거나 낮은음자리표가 되지 않는다.


높은 음자리표가 왼쪽, 낮은 음자리표가 오른쪽이다. 피아노는 둘 다 쓰는 반면, 바이올린은 왼쪽만 쓴다


사실 지금은 내가 낮은음자리표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서 완전히 까먹은 것 같긴 하다. 그런데 그때도 잘 못했던 기억이 난다. 애초에 낮음 음자리표랑 높은 음자리표는 ‘도’의 위치가 다르다.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고 낮은음자리표와 높은 음자리표를 동일한 개념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선생님이 몇 번을 설명해도 그때만 고치고, 혼나지 않기 위해서 고치고, 그다음에는 또 그랬다. 연주하던 곡을 개인지도받을 때, 선생님은


“오른쪽 손은 잘 치네. 왼쪽 손은 왜 그래?”


라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셔야 했다. 피아노는 오른손은 높은 음자리표, 왼손은 낮은음자리표를 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름의 멀티태스킹이 필요한 악기인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멀티태스킹이 엄청나게 안됬던 것인가??

그렇게 내 진도는 점점 느려졌고 지적을 많이 받았고 나는 지쳐갔다.


그래도 반복에 반복을 하다 보니, 나도 비록 7살이지만 살아서 생각하는 호모사피엔스이다 보니, ‘배움’이라는 걸 했다. 나름 연주할 줄 알았고 아마도 낮은음자리표를 읽기는 읽었을 거다. 속도가 조금 느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제 또 다른 문제는 저번에 나왔던 그 친구다.


그 친구는 나보다 늦게 학원에 등록했지만 훨씬 잘했다. 개인지도와 개인연습 중심의 학원이다 보니, 정확히 그 애가 얼마나 잘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와서 그런 걸 물어볼 사이도 아니고. 그렇지만 엄마의 말도 그렇고, 당시 느꼈던 것도 그렇고, 걔는 연주를 꽤 잘했다. 재능이었을까, 노력이었을까?


우리는 같은 연습책을 사용해서 개인지도와 개인연습을 하는데, 점점 걔 진도가 나의 진도를 따라왔다. 난 못했고 걔는 잘했으니까. 나는 지기 싫었겠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못했고 걔는 잘했으니까.


내가 같은 곡을 계속 연주할 때도 걔는 곡을 통과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그 애가 그것에 대해 잘난 척을 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그렇고 우리는 피아노에 대해서 한 번도 대화를 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느낌적으로 나는 모든 것을 알았고 ‘열등감’을 느꼈다.



왜 쟤는 잘하는데, 나는 못하지?

왜 나는 못하는 거지?

내가 쟤보다 많이 했는데?

내가 쟤보다 열심히 했는데?



그 애보다 내가 열심히 하긴 했을까… 의심이 들긴 하다만, 어쨌든 그 당시 나는 굉장히 억울했다.




명확히 기억나는 날이 있다. 도대체 왜 그날따라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걔가 나보다 굉장히 잘한다는 게 부각되는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좁은 연습실에서 문 밖에서 내가 최대한 안 보이도록 피아노 옆에 숨어서 울었다. 그냥, 걔가 나보다 잘해서. 내가 너무 못해서.


선생님이 알고 들어오셨다.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물론 7살짜리가 그렇게 철저하게 숨기지는 못했을 테지만, 도대체 어떻게 많고 많은 아이들 중에서 그 어린아이가 연습실에서 혼자 울고 있는 걸 아셨단 말인가?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방이 방음이 안 됐던 건 아닐까….


그렇게 피아노를 향한 반감이 계속 쌓여갔다.




점점 하기 싫었을 거다.

가기 싫었을 거고, 연주하기도 싫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니면 수많은 날들 동안, 나는 엄마에게 말했겠지.


"엄마 나 피아노 싫어."

"어려워."

"하기 싫어."

"그만하고 싶어."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여러 번 말했을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렇게 쌓이고 쌓이다... 어느 엘리베이터 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가 엄마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나 피아노 싫어."

"그럼 차라리 바이올린을 해볼래?"


너무 뜬금없는 전개였다. 급전개랄까.

'피아노를 그만둘래?'도 아닌, '바이올린을 해볼래?' 라니. 그런 뜬금없는 답변에 나는 당당히 대답했다.


"응!"


이라고...

바이올린이 뭔지 나는 그때 제대로 알기나 했을까? 한두 번쯤은 봤겠지. 아마 오케스트라 영상이나 애니메이션에서 한두 번 봤을 수도 있다. 실제로도 봤던 것 같다. 정확히 이 시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친한 언니였던 S가 바이올린을 그 당시 연주하고 있었고, 그 집에 놀러 가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바이올린의 활털이 한 줄이 아니라는 것에 굉장히 놀랐었는데...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바이올린 활털은 한 줄같이 보인다)


스크린샷_9-11-2025_152348_www.google.com.jpeg
스크린샷_9-11-2025_152623_www.google.com.jpeg
왼쪽, 실제 바이올린 활, 여러 가닥의 털로 만들어졌다. 오른쪽, 애니메이션에서 주로 나오는 활. 한가닥처럼 보인다.


나는 바이올린을 어떻게 연주하는지, 어떤 소리가 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당당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피아노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었기 때문이리라. 저번에 말했던 재미있는 일화들은 그때 생각도 안 났나 보다. 그냥 피아노를 그만둘 수 있어서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피아노 학원에서 박자 세는 기계인 메트로놈은 항상 규칙적으로 울렸다.

틱, 틱, 틱, 틱.

그러나 어쩌다 한번 그 깨지지 않던 리듬이 바뀌었다.

틱, 틱, 틱, 틱, 틱틱, 틱, 틱...

두 번 울리는 그 별거 아닌 소리를 듣겠다고 학원 언니들은 메트로놈 앞에 죽치고 앉아있었다. 들으면 재밌다고 깔깔 웃고, 누가 말하는 바람에 못 들으면 조용히 하라고 외치면서. 이해가 안 됐다.

어쩌면 그 소리가 웃긴 게 아니라 '변화'라는 것을 느꼈을 때 행복함을 느낀 게 아닐까?

피아노와 이별을 선언한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가 느낀 행복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게 피아노와는 갑작스럽지만 후회 없는 이별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깔끔한 헤어짐이 오히려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에게 애정이 없을 때 그만두었으니, 싸울 일도, 미워할 일도 없다. 그저 나의 '전남친' 피아노를 너무 멋지게 다루는 사람들을 볼 때, 부러움과 약간의 아쉬움이 밀려올 뿐.


깔끔한 피아노와의 이별을 뒤로하고 나는 이제 또 다른 만남에 도달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만났다.

처음부터 우리는 설레는 만남으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질투에 못 이겨하게 된 만남이랄까...

뭐, 자세한 건 다음에. 어쨌든, 나와 바이올린은 그렇게 '설레는' 만남을 하게 되었다.



오늘도 간절함 속에서 피어난 뜨거운 글쓰기를 이어나가는 에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