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우리 일상

오랜만에 즐거웠다.

by 에원

이번 주 금요일날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레슨을 갔다.

익숙한 학원에 들어섰다. 지난 7,8년간 그렇게 해왔건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브런치북을 만든 후에 학원을 거의 가지 않았다.

과거를 되짚고 기억을 살려내며 지나간 시간을 살려내는 작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바이올린 학원'이란 공간을 설명하고 상상하고 쓰면서도 그 공간을 실제로 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주에 학원에 들어섰을 때, 상상에 비해 너무 사실적이라 상당히 놀랐다.

아, 맞다.

이 노란 벽, 각종 포스터들이 붙어있는 벽, 붉은빛 소파, 만화책이 가득한 책장, 레슨실 세 개 합주실 한 개, 문과 마주하는 레슨실 창문으로 보이는 쌤.

이게 실제로 존재하는 거였지!


이런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들었다ㅎ

(이제 8년 동안 이 학원을 다녔으나 이번에 처음으로 레슨실 문 위에 푯말에 '레슨실'이 아닌 '렛슨실'이라고 적혀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여간 레슨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생각보다 평범했고 레슨 자체에는 큰 감명이 없었다.

조금은 짜증 났고 많이 헤맸지만 생각보다 완성도 있는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레슨이 끝나고 바이올린을 정리한다. 그때 선생님과 한두 마디 대화를 한다.



"쌤 저 레슨 얼마나 남았죠?"

"이번이 마지막일걸?"



에?

뭐라고? 난 아직 준비가 안됬는걸.

이런 이별은 내가 상상하던 게 아니었는걸.



"아, 너 이번 돈 낸 거까지만 하고 그만둔다고 했나?"


선생님도 살짝 당황하신 표정.


"아녜요 쌤 엄마가 한번 더 남았다 그랬는데?"

"아닐걸..."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계산한 결과, 내가 맞았다.

다음 주 금요일이 마지막 레슨.


이 대화를 마치고 인사를 한 후 학원을 나섰다.

배웅하는 선생님과 인사하는 나 사이의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이윽고 이 긴 인연도 마지막임을 드디어 직시한 두 사람 간의 기류.


거의 7년 동안 이곳을 매주 왔다.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다.


고정된 일상처럼 이곳을 드나들던 때가 있었다. 많았다.

그렇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단 한 시기뿐이다. 바로 초5~6.




첫 합주 이후 합주는 계속되었다.

나와 J, C 그리고 Y 언니는 '최고참 실력자' 위치에서 연주를 계속했고 익숙하지 않던 낮은 권수 곡들도 차차 익숙해져 갔다.


더불어 초등학교5학년 말이나 6학년 초였던 나는 레슨 시간을 옮겼다.


옛날에는 한결같이 월요일을 고수했다.

합주가 있었던 시절에는 일주일에 두 번이 아닌 한 번만 학원에 올 수 있는 '합주 전 꿀타임'을 우리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그 자리를 빼앗기고 나서 합주도 사라지자 금요일에 정착했다.

다시 합주가 시작했으며 일주일에 두 번이나 나를 학원에 데려다줄 여유가 엄마에게 없었으므로, 나는 다시 시간을 월요일로 바꿔야 했다.


월요일 이른 시간대는 탈락, 학교 끝나고 학원 가야 했다.

합주 이전 꿀타임은 이미 누가 차지했다. (기억상 J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선생님의 재량 하에, 원래 존재하지 않는 시간대인 '합주 후 시간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바이올린 일상이 고정되었다.




6학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초등학교 6학년은 너무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정말 행복하게 보냈다.

그에 따라 내 바이올린 생활도 좀 더 밝아진 것 같기도 했다.


참 오랜만에 바이올린 연주하는 게 재밌었고, 잘하고 싶었다.

밤늦은 레슨이 나쁘지 않았다.



바쁘게 학교를 갔다가 학원을 간 후 와서 저녁을 먹는다.

대충 시간을 때우거나 숙제하다가 시간이 되면 바이올린과 내 파란색 에코백을 들고 학원으로.


차에서 내린다.

엄마는 오지 않는다. 이제는 합주나 레슨은 '엄마에게 자랑하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므로 상관없다.


가면 역시나 바글바글한 신발장이 나를 기다린다.

여러 명의 작고 큰 바이올린 케이스가 널브러진 낮은 책상과 바닥을 거쳐 바로 레슨실로 들어간다.

다른 아이들은 밖에서 바이올린을 풀고 넣지만 나는 레슨실에 넣는다.

어차피 합주 끝나면 내가 다시 들어올 텐데.


간단하게 바이올린을 풀고 악보대를 설치한 후 레슨실 밖으로 잠깐 나온다.

J는 역시나 소파 코너에서 핸드폰 보는 중.

C는 나보다 늦게 온다.

Y언니도 나보다 늦는다.

어린아이들은 이미 안에서 합주가 진행 중이다.

우리보다 어리면서 우리와 같이 합주를 들어가는 애들은 몇 없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아예 없다.



합주실 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우릴 부른다.


"4,5권 할게요, 들어오세요~"



어린아이들은 엄마들과 앉아 우릴 구경한다.

쭈뼛쭈뼛 양손 가득 악기와 악보대를 들고 들어간다.


맨 뒷줄에 J, C, 그리고 가끔은 Y 언니와 함께 서서 연주를 한다.


연주가 끝나면 J, C, Y 언니, 선생님, 나, 그리고 참을성과 음악에 대한 관심이 있는 몇몇 아이들과 그 부모님이 모두 합주실에서 걸어 나온다.

모두 바이올린과 악보를 바리바리 싸서 나간다.



선생님과 나만 학원에 남았을 때, 선생님은 학원 문을 잠근다.

레슨 중에 누가 들어오면 둘 다 모를 것이기 때문이란다.


나는 바이올린을 다시 넣지 않고 얌전히 올려놓은 채 레슨 준비를 한다.

창밖으로 어둠이 몰려오는 저녁, 나의 레슨은 시작한다.


대략 7권 진도를 나가던 그때의 레슨이 끝나면,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을 싸면서 선생님과 스몰토크를 한다.

그리고 익숙하게 문 잠금을 풀면서 나간다.



고정된 일상이었다,

고정된 월요일이었다.


고정되어서 좋았다,

고정되어도 좋을 만큼 가볍게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아.

Y언니는 그 고정된 일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주에 나오는 것을 멈췄다.

정황상, 레슨도 그만둔 것 같았다.

가장 친했던 나도 그 이유를 몰랐고, 나와 J, C는 암묵적으로 '중학생'의 시간문제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비록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언니와 연주할 수 있었던 그 마지막 몇 주가 참 소중했다.

이후 나는 J, C와 함께 고정된 일상을 나아갔다.)





지금도 어찌 보면 내 바이올린 일상은 고정되어 있지만, 그때를 회상하며 느끼는 묘한 즐거움과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합주를 안 하는 것이 차이점일까?

그냥 그때와 지금의 마음가짐이 변한 것일까?


와글와글하던 합주의 기분과 묘한 기류, 그리고 저녁의 홀로 남은 레슨실을 다시 느껴보고 싶긴 하다.

지금도 내 레슨 타임에는 선생님과 나밖에 없지만, 그 특유의 느낌은 전혀 남지 않았다.


어떻게라도, 레슨 시간을 창조해 내서라도 바이올린을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원동력이었을까?

그때 무렵, 중딩이 되면 더 이상 바이올린을 못한다는 생각에 유독 열심히 하긴 했다. 강제로 끊게 된다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재밌어지기 시작하고....ㅎ

(중학생이 되면 오케스트라를 시작하는 동시 레슨은 끊을 계획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발적인 포기와 타인에 의한 포기의 차이가 그때와 나의 마음가짐의 차이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 주 금요일날 슬플까, 허전할까?

기쁠까?

괜찮을까?



너무 기쁘진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8년의 세월에게 예의를 표할 수 있을 만큼은 슬펐으면 좋겠다.



오늘도 간절함 속에서 피어난 뜨거운 글쓰기를 이어나가는 에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