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 변함없이

by Eian Lim

XVII




보인자(保因者)

현재 자신의 건강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나, 후대에 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변이 인자를 가진 사람




"현명한 자는 보는 걸 믿고, 겁쟁이는 믿는 걸 본다."


이오시프 스탈린




목차


1부

0. 프롤로그 - 변함없이

1. 탈출

2. 탐색

3. 정착

4. 평온

5. 안개

6. 예감

2부

7. 복귀

8. 기시

9. 예지

10. 확신

11. 설교

12. 변절


3부

13. 고독

14. 정찰

15. 동행

16. 회귀

17. 허영

18. 맹목

19. 과거

20. "보인자"

21. 에필로그 - 변함없이


22. 진실




1부


déjà-vu [ deʒavy ]

1. 이미 본 것

2. 「심리」 기시(旣視)체험, 기시감 (체험하지 못한 상황 앞에서 이미 체험한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




0. 프롤로그 - 변함없이




세상은 무너졌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어느 날, 일부 사람들이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폭주하며 다른 사람들을 해쳤고, 사람들은 이상해 보이는 그들을 점차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게만 보이던 증세들은 점점 주변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턴 거리엔 인간이라 볼 수 없는 존재들이 활보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것이 단순한 독감의 변종인 줄 알았다. 적어도 뉴스에서는 연일 '신종 인플루엔자'라는 단어만을 반복했고, 정부는 침착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서까지 침착하라며 당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 존재들이 거리를 배회했지만, 아직 멀리 있는 일처럼 여기며 말이다.

바이러스. 감염되면 괴물이 된다고 한다. TV에서 보았던 위험한, 통제 불능의 존재. 그런 무언가가 되는 듯 보였다. 나는 감염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비발현자'라고 분류되었다. 감염은 되었지만 아직 변하지 않은 상태. 언제 변할지 모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라고 불렸다.

이런 간략한 설명만을 남긴 어느 연구진은 비발현자들을 모아 특별한 시설에 가두었다. 그들이 가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공간이었지만, 썩 기분 좋은 곳은 아니었다. 회색 벽과 바닥, 그리고 잿빛 천장. 모든 것이 칙칙하고 차가웠다. 창문도 없었고, 빛바랜 형광등만이 하루 종일 나를 비췄다. 그곳에서는 여러 가지를 실험했는데,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영화에서 보던 것만큼 폭력적인 실험도, 난 경험하지 못했다.

나가지 못할 작은 요새에서, 사람들은 여러 부류로 나뉘었다. 누군가는 이 생활에 점차 적응하여 그럭저럭 괜찮게 살아가는 반면, 아직 적응하지 못한 자들은 항상 바깥을, 평화로운 과거를 희망하기 일쑤였다. 양측 모두와도 어울리지 못한 난 그저 홀로 방에서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외롭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내 업무를 처리할 땐 자리에 홀로 앉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느낀 사람은 나뿐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이겠지.

적응, 회의, 그리고 분노. 우리가 그곳에서 느꼈을 감정들일 것이다. 자유를 원하던 사람들은 결국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자유를 원하던 '존재들'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시설 내부에서 감염자가 창궐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체제로는 막을 수 없을 만큼의 무리들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폭주하는 그것들을 막지 못한 연구진들은 살해당하거나 도망치는 길을 택했으며, 난 여러 '비발현자'들에 이끌려 그 혼란 속에서 탈출했다.

이제, 난 자유롭다.

멸망한 세계에선, 모두들 과거를 회상한다. 찬란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그들의 열망을, 난 존중한다.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의 과거는 그닥 행복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라는 말이 있다면, 어째서 그 반대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여긴 더 이상 날 억압할 것이 없다. 통념도 날 잡아두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수 있고, 잠들고 싶을 때 잠들 수도 있다. 평화롭다.. 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오늘도 나는 거울 앞에 선다. 언제부터인가 생긴 버릇이다. 세면대 위에 걸린 작은 거울, 모서리가 깨져서 금이 간 그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거울 속 남자는 여전히 평범해 보인다. 눈동자는 여느 때처럼 검고, 피부도 창백하지만 정상인 듯하다. 감염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괴물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정상이군."


고요한 목소리가 욕실 안에서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