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탈출
거울 앞에 서니, 추억이라고 부를만한 기억이 다시금 떠오른다.
분명,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날이었을 것이다.
기분 나쁜 자명종이 울리고,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 같은 장소에서 식사하며, 몸에서 피를 약간 뽑아간 뒤, 조금의 자유시간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 다소 간단하고도 명료한, 그러면서도 지루한 그런 날이었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며 살던 난 이런 환경에 빨리 적응했었다. 다만, 확실했던 건 이 시설 또한 안전한 장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날도 반복되는 일상의 시작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난 꿈을 꾼다. 꽤 자주 꾼다. 흔히들 '예지몽'이라 부르는. 그런 꿈 말이다. 하루를 보내며, 분명 꿈에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하루에도 다수 든다. 그러나, 익숙함이 느껴지는 건 그저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뜨는 장면, 적당한 간격으로 깜빡거리는 비상등 같은 것뿐이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꿈을 꾸고 일상을 보낼 것처럼 보이던 찰나, 기분 나쁜 자명종이 아닌, 기분 나쁜 사이렌이 아침을 장식했다.
사이렌은 매섭게 시설을 울렸고, 붉은빛은 방을 감돌았다. 졸음을 거둬내고 문을 열고 나가자, 이미 절반 정도 헤집어진 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잠겨있던 다른 문들은 이미 뜯어져 형체를 유지하지 못했고, 수많은 타일들도 이미 깨져버린 이후였다.
어렴풋이 사건의 이유가 짐작되려던 그때, 등 뒤로는 이미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어어어어어얽..."
"끄아아아아아앍!!!!!!"
괴성을 지르던 그것, 아니 '감염자'의 주먹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이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날아온 주먹은 내 머리카락을 스쳤고, 큰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혔다.
공포가 나를 엄습한다. 두려움이 내 발을 붙잡는다.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뛰는 걸 멈출 수는 없다. 뒤에서 무언가가 맹렬히 쫓아오는 것만이 느껴질 뿐이다.
얼마나 뛰었을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여기! 여기입니다!"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선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낼 겨를이 없었다. 난 의문의 목소리를 향해 뛰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앍!!"
쿵!!!!
돌아보니, 벽엔 크게 파인 자국과 함께 커다란 핏자국이 그려져 있었고, 추격자 또한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다행입니다, 크게 다치시진 않은 것 같군요."
처음 만난 그는 거리낌 없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닥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호의를 베푼 사람의 손까지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이다.
"전 K입니다. 그나저나 안심이네요, 이런 상황에서도 생존자가 남아있다니, 하하.."
군복을 입은 그의 얼굴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저와 함께 다른 생존자를 구조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가 제안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2명끼리만으로도 벅찰 텐데, 괜찮습니까?"
"아닙니다. 생존자가 한 명이라도 남아있다면, 구조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상에게 베풀 수 있는 그의 호의.
할 수 없이 난 그를 따르기로 결정했고, 우린 생존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우린 3명 정도의 생존자를 찾아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사람을 지키는 것은 저의, 그리고 군인의 의무입니다."
급조된 일행이었지만, 우리 5명은 탈출을 위하여 탐색을 이어 나가기로 했다.
모두들 목적을 위해 노력해 주었다. 하지만 노력이 모두 성과로 이어지는 건 아닌 듯하다. 결국 우린 시설 안에서의 야영을 결정했다.
"그래도, 시설 내부엔 다양한 물건들이 많아서 다행이에요."
자신을 J라고 소개한, 무리의 유일한 여성이 말했다. 그녀는 주변에서 식자재를 모으고, 모닥불을 통해 요리를 시작하였다. 다양하다기엔 의문이 드는 식자재들이었지만, 그녀의 뜻을 막기엔 속이 공허했다.
시간이 흐르고, 요리를 먹은 나와 무리는 드디어 높은 질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현실에 식기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요리에선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건조하게 반복되던 일상 속에서 몇 달 만에 찾아온 새로운 음식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숟가락 소리가 저물어가고, 모두가 남김없이 음식을 처리했다. 짧지만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나고, 난 혼자 주변의 탐색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오늘도 익숙한 풍경이 반복된다. 그저 내가 오래 있었기에 느껴지는 감정이 아닌,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런 익숙한 기분.
마치 '데자뷔'.
의지로 따라가는 게 아닌, 그저 몸이 향할 뿐.
그렇게, 난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걸 발견했다.
"찾았어요! 드디어 출구를 찾았다고요!"
내 외침을 듣고 모두가 몰려왔다. 그들의 눈은 오로지 출구만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나의 뒤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 뒤의 그림자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던 것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앍!!"
"ㄷ.. 다들 도망쳐!!!"
나와 그들은 뒤에 따라오는 괴물을 피해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선두로 달리고 있던 난 계속 느껴지는 기시감을 따랐다. 기둥, 문, 의자, 여러 가지 장해물들이 익숙한 듯 지나가고, 내 길을 따라 무리는 빠른 속도로 탈출을 향해 달려 나갔다.
뛰다 보니 저물어가는 햇살이 보인다. 더 이상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허억.. 헉.. 다들, 다친 곳은 없으시죠?"
가장 막내로 보이는, T라는 청년이 모두의 안부를 물었다.
"네.. 모두 괜찮은 거 같네요. 저기, 아저씨도 괜찮은 거죠?"
모두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간, M이라는 청년이 나에게 물었다.
"그래.. 나도, 모두도 무사한 거 같네."
우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시설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어둡지만 무겁지 않은, 보이지 않지만 막막하진 않은 그런 공기가 느껴진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밤이다.
"그럼, 다들 어디로 향하실 건가요?" 모아진 나뭇조각들 앞에서 J가 물었다.
"아마 군 시설로 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무기 및 현 상황 파악이 필수적일 거 같아서.." 불씨가 피어오르며, K가 말했다.
"음.. 아직 너무 이른 거 아닐까요?" M이 K에게 말했다. "무엇보다, 아저씨 지금 몸 상태도 안 좋잖아요."
사실이었다. 모두를 구조하며 그는 크고 작은 상해를 입었고, 다른 무엇보다 이를 치료하는 게 급선무로 보였다.
"그럼.. 차라리 우리 함께 다니는 건 어때요? 그리고 거주지도 찾아보는 거죠!" 막내인 T가 말했다.
따라서 간단히 정해진 우리 모두의 목표는 '거주지'를 찾는 거였다. 모두가 함께, 살 곳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비록 갑작스레 모인 사람들이지만, 왠지 모르게 긴장이 풀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