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변절
"...
이걸.. 피했다고?"
거센 바람 소리가 내 귀를 스쳤다.
"진정하시지 K, 우린 '과거에 얽매여선 안 되니까'. 더군다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당신이 그러면 안 되지. 아닌가? '리더'?"
그의 총이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검붉게 반짝이는 총은 누구에게라도 두려움을 선사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난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다. 네가 어째서 이런 행동을 저지르는지, 뭘 근거로 이러는지 모르겠단 말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우리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거라고!"
"이젠 더 봐줄 수도 없겠군. T, M, 그리고 J까지 다 네 손에 목숨을 잃었어! 죄책감 같은 건 없나? 아니, 애초에 어떤 감정이 들기는 하는 건가? 넌 그저 '달빛이 눈부셨다'는 말로 이 살인들을 치부하려는 셈이냐?!!"
"치부라니? 난 이유 없이 살인, 아니 '살해'를 저지르진 않았어!! 우리에겐 지켜야 할 평화가 있었다고!"
"으아아아아 제기랄!!! 더는 못 들어주겠군! 여기서 전부 끝내버리겠어!!!"
그의 분노는 나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정당한 행위에 있어 죄책감은 필요 없을 감정이다.
"하늘이 아름답군. 그래, 몹시도.. '평화로울 날'이야..!"
우선, 거리를 벌린다.
"..?! 어디로 도망치는 거냐?!"
누군가의 피를 먹은 계단에선 소리 따위 나지 않았다. 2층으로, 부엌으로 향해야 한다.
뒤에선 과거에 목을 맨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과업으로부터 도망칠 생각이냐?!"
맹렬한 발걸음 소리가 이어진다. 2층에 먼저 도착한 난 은은히 빛나는 금속들을 향해 달렸다. 처음으로 평화를 가져다준 물건을 향해, '푸른 선홍빛'을 향해.
빛에 가까워질수록, 손이 끈적해지는 게 느껴진다. 붉은 액체가 손을 감싸던 그 감정을, 최초의 죽음의 그 기분이 다시금 도래한다. 하지만, 그건 최선이었을 뿐이다.
추격자가 2층에 도달하였을 땐, 이미 내 손엔 그리운 물건이 들려있었다.
"이 집 안에서 도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뭘 위해 그렇게까지 힘쓰는 거지? 너의 노력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순 없다는 걸 잘 알 텐데? 지나간 건 지나간 대로 두라는 너의 말은 그런 뜻 아니었던가?"
"그래, 네 말대로 죽은 자는 돌아올 수 없지. 하지만, '죽인 자'는 돌려보낼 수 있다. 그것이 먼저 가버린 자들을 위한 선물이자, 너 같은 존재를 위한 '단죄'다!"
그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도 태풍을 불러오듯, 연륜의 손가락이 당겨버린 방아쇠는 나에게 단죄를 선사했다.
...
하지만, 만일 단죄할 죄가 없다면?
"...너 설마.."
떨리는 그의 눈앞으론 두 갈래로 나뉘어진 단죄만이 남겨졌다. 난 천천히 바닥에 떨어진 반쪽짜리 총알을 집어 들었다.
"전장에서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니, 군인으로서 실격이군!!"
그 말에 눈을 치켜뜬 그는 감정을 내 옆구리로 분산했다. 바람 소리가 고막을 강타하며 부러진 늑골이 살을 파고들었다. 거센 충격으로 난 멀리 날아갔고, 또 다른 익숙한 장소로 돌아왔다.
충격으로 부서진 문의 안에선 피로 물들어진 침대보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돌리자, 곧바로 날카로운 파이프가 있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은, 이제 내 손안으로 돌아왔다.
"그건..."
"그래. 평화를 가져다준 물건이지."
그의 손이 빠르게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에선 읽을 수 없을 일그러진 표정만이 존재했다.
한층 묵직해진 내 손과 함께, 난 1층으로 도주했다. 맹렬히 추격해 왔지만, K와의 거리는 꽤나 멀었다. 어느 정도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는 건,
그걸 외면하라는 게 아니었다!!!"
"?!! 젠장!"
무려 한 층을 도약하여 거리를 좁혔다. 쌓인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인가.
확실히, 그는 강하다.
그리고 동시에 공격이 날아올 예감이 온다. 엄폐물이 필요하다.
탕! 탕! 총의 연격 소리가 이어지고, 잡담과 농담의 판의 추억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식탁 뒤에 숨은 난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무기를, 무언가를...
총격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그의 발소리를 들었다. 모든 것을 잃은, 힘없고도 무거운 발걸음이 느껴진다. 동시에, 내 눈엔 적절한 도구가 들어왔다.
팡!!
허공의 베개를 가른 단죄의 총알은 아름다운 깃털들로 정의를 수놓았다. 찬란한 정의는 눈을 멀게 할 뿐이다.
이때를 놓쳐선 안 된다.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한데 모은 난 총알을 붕대에 묶어 간단한 제압용 무기를 만들었다. 팔 정도는 묶을 수 있을 것이다.
파이프를 바닥에 꽂아놓은 뒤, 빗발치는 정의들 아래로 K의 뒤로 이동했다.
"전장에선 등을 보이면 안 된다고 안 배웠나?" 붕대를 날려 한쪽 팔을 묶는 데 성공했다.
"크윽!" 총을 든 손은 제압당했고, 그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난 그를 넘어뜨렸고, 단죄의 응보를 위해 칼을 치켜들었다. 그의 눈은 달빛에 힘입어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분노만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넌 내가 만들어놓은 평화에 의문을 표하고, 그걸 파괴하려 들었지. 이건 그 대가다.
평화를 파괴하는 건, '괴물'과 다를 바가 없지.
죽어라."
...
쨍그랑!!!!!
?
하늘에선 부서져 버린 응보의 기회가 내리고 있었다. 그가 쏜 총알이 검신을 파괴하고 만 것이다.
"평화..? 평화?!! 이런 게 정녕 네가 원한 평화란 말이냐?!!"
단심에서 우러나온 참된 감정은 내 늑골을 파고들었다.
"크얽!!" 다시금 식탁으로 돌아온 난 칼을 버리고 파이프를 들었다. 좀 더 직감적인 판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난 그리하여 식탁을 K를 향해 밀어냈다. 역시, 그는 강력한 근력으로 식탁을 파괴했다. 저것이 정녕 리더의 자질인 것일까. 부러진 식탁의 옆으로 달려간 난 K에게 최대한 근접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총을 바로 치켜들지 못했다.
왜, 왜 주저하는 거지?
온몸을 회전시켜 그의 총을 떨쳐내는 데 성공했다. 달그락거리며 굴러가는 총은, 분명 그의 유일한 무기였을 것이다.
"방심하지 마라. 왜 총을 들지 못한 거냐."
난 자세를 고쳐잡고, 최후의 일격을 날릴 준비를 했다.
"이젠 작별이겠군, 너와의 시간은 좋은 추억이었다. 너를 만난 건 찰나 동안의 행운이었다."
식사, 게임, TV, 보급, 안테나, 탈출. 산발적으로 과거의 추억들이 떠오른다. 파이프를 진 손이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잊지 마라. 평화를 위해선, 무엇이든 해야만 하다는 사실을.
한때는 부서졌던 왼손으로 파이프를 부여잡았다.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달려 나간다.
챙!!!
금속끼리 맞붙는 강렬한 소리가 집안을 울리고, 어둠을 밝히는 스파크가 튄다. 허리춤에서 꺼내진 작은 칼 하나가, 내 파이프를 떨쳐냈다.
"하하하하! 숨겨둔 무기가 있었군!!"
"크아아!!" 거세게 덤벼오는 건 K가 먼저였다.
수십 번의 스파크가 일어났다. 그의 칼과는 다르게, 파이프는 점점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젠 주저가 느껴지지 않는 재빠른 손놀림이 내 무기를 헐뜯어놓았다. 이젠 한번의 공격이면 부러질 날카로웠던 무기로, 체중을 실어 나이프를 쳐냈다.
나이프는 총과 같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고, 내 파이프도 부서져 버렸다.
우리는 거리를 둔 채 숨만 고르며 벼르고 있었다.
"난 적어도 우리들의 행복이 오래 갈 것만 같았다. 이게... 정말 자네의 결정인가..? 정말 자네는 이 결과를 원한 건가?"
"난 평온을, 안전을, 행복을 원했어. 우릴 죽이지 않게 그들을 보내준 것이 그들의 '평안'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J는..."
"난 평화를 지킬 거다. 누군가 날 막아서더라도, 난 그를 없애서라도 우리의 평화를 보존할 거야."
"...평화? '평화'? 자네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는 아는 건가?
우린 널 지키기로 했어, 살리려고 했다고!!
위험한 이 세상에서 왜 아무것도 맡기지 않은 거 같나? 왜 3층에 홀로 보낸 거 같나?!"
"넌.. 넌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T도, M도, 심지어 J도! 그녀가 어떤 상태였는지 말했을 텐데? 그녀도 분명 감염증세를 보이고 있었다고!.."
내 눈이, 그리고 그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하, 하하..
괴물새끼.."
우리 사이의 거리가 점차 멀어진다. 그는 힘없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쳐듣고 있었군.."
그는 문고리를 돌렸다. 듣기 싫은 겨울의 비명이 문 사이로 흘러넘쳤다. 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결국 우리가 옳았어."
소외감.
"모두가 죽었음에도,"
불안감.
"모두가 떠났음에도,"
그리고 고독감.
"자네만이 남았으니.."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붉은 월광 속의 사내는 모든 걸 잃은 무거운 어깨로 서있었다.
"난.. 자네가 보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겠네. 자네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 알 수가 없어.
...
다시는..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더 이상 서늘한 바람의 소리는 들리지 못했다.
떨리는 어깨 뒤로 난 생각했다.
그저 변절자가 떠나갔을 뿐이라고.
...
어느 때보다 공허한 3층으로 돌아왔다.
그림자라는 이불은 날 감쌀 여력이 되지 못했고, 이제서야 느끼는 고독의 한기는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J는 뭘 말하려 했던 걸까.
K는 뭘 말한 것일까.
호기심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만,
후회만큼은 떠오르지 않는다.
떨리는 어깨를 끝으로, 오늘의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