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day·break [ ˈdeɪbreɪk ]
1. 새벽, 동틀 녘, 여명
13. 고독
고요하다. 한없이 고요하다.
더욱 내려앉은 겨울의 추위는 내 방까지 자리 잡았다. 창문이란 게 있던 곳엔 이제 테이프의 흔적밖에 남지 않았고, 거센 바람과 함께 소복이 눈이 쌓여있었다. 손을 가져다 대니, 이전보다 추워진 날씨가 체감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난 정장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더 이상 편안함만이 존재하지는 않는 3층을 나와 부엌을 향했다. 불이 잘 켜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돌려봤지만, 타닥거리는 소리만 날 뿐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은 굶지 뭐."
본능적으로 온 것이기에 식사를 하고픈 마음은 아니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1층으로 옮겼다.
그곳엔 붕대를 감은 천사가 있었다. 두려우리만큼 하얗고 창백해진 얼굴은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듯했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어깨는 지금 이곳에선 그 누구보다 가벼울 것이다.
어깨에 손을 얹어보았다.
...
아무런 반응을 보일 리 없었다.
손에는 싸늘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적어도 영원하게 이어질 평온을 누리는 자는
건들지 않는 것이 좋아 보인다.
그녀도, 나도
어느 누구보다 행복할 것이다.
행복할..것이다.
분명..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치켜들었다. 창고에 박혀있던 건전지로 돌아가던 리모컨은 어느새 꺼져버리고야 말았고, 설령 리모컨이 작동했다 한들 TV에선 지지직거리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을 터였다.
작동하지 않을 물건을 저 멀리 던져버린 난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게, 내가 원했던 평화인 걸까."
귀가 어색해할 정도로 고요함이 이어진다. 간간이 바깥에서 새소리가 들리는 것 이외엔 아무런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집 밖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2층에서 간간이 떨어지는 물방울의,
고요함을 뚫고 들려오는 내 심장 소리에 집중해 보았다.
식탁에서 들려오던 농담들의 소리가, 게임기와 함께하던 장난들의 소리가, 부엌에서 일어나던 잡담들의 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내게 다가온다.
"넌 잘못 보고 있어."
"네가 보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어."
...
"난 노력했는데.
안그래?"
내 말을 들었을지조차 모를 천사는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입이 있음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존재들은 불쌍하기 짝이 없다.
내 말을 끝으로 어떤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흐른다.
하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혼란으로 시작했던 모든 일들은 나에게 확신을 주었고, 예지라는 시각은 새로운 관점을 가져다주었다. 내 손으로 행한 모든 일들은..
후회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흔들리던 마음도 다소 누그러진다. 다소 진정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며칠 만에 다시 되돌아본 우리의 집은 고요하고 넓었으며 몹시 평화로웠다.
그래.
이것도, 평화인 거야.
시간은 야속하게도 흐르고야 만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버렸고, 인간의 한계에 봉착한 신체는 한시라도 빨리 휴식을 취하고 싶어 했다. 꺼려지는 내 방으로 돌아와 창문이 있던 흔적을 지켜보았다. 검은 하늘에선 조금씩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꽤나 볼만한 경치였지만 이대로 두었다간 저체온증으로 고통받을 게 분명했다.
좀 오랜 시간을 소모했지만, 이 정도면 될 것이다. 돌아오지 않을 배신자 녀석이 가져왔던 나무판자가 이렇게나 쓸모가 있을 줄이야. 적어도 이젠 추위에 시달리진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추위가 아니라면 어째서 내 몸은 이렇게 떨리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그런 게 중요하진 않다. 머리를 비운 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쌀쌀한 아침 공기와 함께 일어난 나는 창고로 향했다. 찾아야 하는 물건들이 있다.
이젠 곁에서 날 도울 사람이 없을지라도, 내가 만들어낸 평화는 이토록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자, 내가 찾던 물건을 몇개 구하는데 성공했다. 작은 배낭같이 소지품을 넣을 수 있을 만한 물건들이 필요했었고, 충분히 그것들을 찾았다.
1층으로 향한 나는 바닥에 흩뿌려진 붕대들을 한데 모아 목도리처럼 만들었다. 그것을 목에 두르자, 차가운 온기가 느껴진다. 그러고는 무릎 꿇고 맞이해주는 천사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녀올게, 그리고 돌아올게."
그 말을 끝으로 난 문을 닫았다.
하지만 아직 가기는 조금 이르다.
무덤은 정말 오랜만에 오는 듯하다.
"잘 지냈어? 너희 둘 다."
죽은 자들은 대답 따위 해주지 않았다.
"잘 지내는 거 같네. '그자'는 떠나버렸어. 너희들을 버리고 자신만을 위해서 도망쳤지. 난 계속 너희를 위해 이곳에 있을 거야. 하지만, 이제 누군가는 총대를 메줘야 돼. 드디어 내가 너희를 위해 뭔가 할 수 있겠네. 잠시 기다려줘. 곧 돌아올 테니깐."
하늘에선 비둘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생물이었다. 평화의 상징인 그 새는 우연히 안테나 위에 앉아 안테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안테나는 거의 내 근처로 떨어졌지만, 부서진 건 그 안테나만이었다.
"조심 좀 해! ... 하. 비둘기랑 대화하려 하다니."
뒤를 돌아 본 집은 생각보다 컸다. 이토록 큰 집이 처음엔 그렇게나 작아 보였다니, 놀랄 일이다. 처음 왔을때 선선했던 날씨는 어느새 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은 서늘한 날씨가 되었다. 모든 감정을 소복이 덮어버릴 눈이 내리는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집이라는 범위에서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가야만 한다. 주변을 탐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더 이상 날 위해 힘써줄 사람은 없다. 내 손으로 평화를 유지해야만 한다.
이젠, 정찰을 위해 밖으로 향해야 한다.
난 굳은 신념과 함께, 집이 아닌 곳의 잔디를 밟으며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