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정찰
몇 개월 만에 다시 나온 바깥세상은 너무나 고요했다. 하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이었던 탓일까. 먼지 대신 눈을 덮은 도시는 황량하다기보단 아름다웠다. 무너졌던 잔해도, 넘어졌던 자동차도 모두 순백의 결정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바닥에 눈을 둘 수 없을 정도로 반짝이는 눈더미들은 삭막하다는 느낌보다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처음 나온 정찰임에도 불구하고, 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 만으론 안 된다. 찾아야 하는 무언가가 있다.
'도시', 그 자의 방에서 발견한 하나의 단어. 그자는 아마 그곳에서 생필품을 얻어왔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후의 평온한 삶을 위해서라도 난 그 장소를 찾아야만 한다.
약간 쌓인 눈들은 내 발자국을 남겨주었지만, 정작 아무리 돌아다녀도 건물은커녕 사람이 살았던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이미 산재된 발자국들은 출발지로 이어질 희망도 버려놓았다.
... 그자는 이런 걸 매일 나갔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일찍 나가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오면서도, 보급을 놓치지 않았었다.
괜스레 옆자리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애초부터 비어 있던 자리임에도.
해가 짧아진 탓인지, 점점 밝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눈을 밟는 소리는 더 이상 기분 좋지 않았다. 저온에 굳어지는 얼음을 밟는 소리는 이제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손전등이라도 챙겨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미 집은 멀어져 버린 이후였다. 오늘 안에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이게 다 예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점점 꿈을 꾸는 빈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편안해진 마음 탓일까, 불안해진 마음 탓일까.
적어도 불안만은 아닐 것이다.
기시라는 또 다른 시각이 멎어버린 이상, 난 현재를 보며 나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새하얀 대지와 칠흑의 하늘은 앞으로 나아갈 용기마저 묻어버렸다.
난 바닥에 누워버렸다. 이제 힘들다. 눈이 밟히는 소리와 함께 그 속으로 파묻혀버린 내 어깨는 떨리는 듯 안 떨리는 듯 갇혀있었다. 여기서 팔다리를 왔다 갔다 하기만 해도 천사를 만들 수 있다는 동심 어린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과거를 보냈다면 좋았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가 죽음의 오한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겠지만 말이다.
"자네는 여기서 뭐 하나? 과거라도 회상하는 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외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난 눈더미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죠?"
"그건 내가 묻고 싶은걸. 이 날씨에, '정장'? 안 추운가? 내가 피워놓은 모닥불에라도 가지 않을 텐가?"
난 의심을 뒤로하고 '온기'라는 미끼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꽤 멀지 않은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 주변의 따뜻한 지면에 앉은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자. 그래서, 이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다고?"
"그렇습니다만, 문제라도 있으신지?"
"허허. 그냥 이 날씨에 정찰한다는 것도 신기하고, 그런 움직이기 불편한 복장이라는 게 신기할 따름이네. 다른 이유는 없네."
정장에 의문을 표하는 건 이 자가 처음도 아니다.
"그냥 편해서 입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정말 의문이군. 정찰한다기엔 너무 부실하게 출발한 거 같은데. 혹시 처음 해보는 건가?"
"맞습니다. 찾는 무언가가 있어서. 그리고, 계속 그렇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시려는 겁니까?"
"하하, 그렇네. 이거 미안하게 됐군."
이렇게 상습적으로 무례를 범하는 인간을 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이자는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도시'라는 곳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순간 그의 얼굴이 굳는다.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치다.
"도시..라고?"
그가 내 얼굴을 노려본다. 정확히는 눈을 보는 듯 보인다.
"하, 도시는 이 눈 안에 있지!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 말이네! 하하!"
"... 당신은 뭡니까?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경을 긁기 위해 기다리는 미치광입니까?"
"아 미안하네 미안하네, 나도 사람을 만난 건 오랜만인지라, 장난기가 돌아서 말이야. 그럼 간단하게 날 소개하도록 할까."
"..."
"그래. 난 '세계를 멸망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라네!"
"..?"
거창하게 일어서 엄청나다는 듯 헛소리를 내뱉은 말끝으로, 그의 배낭에선 빈 술병이 튀어나왔다. "알코올은 유통기한이 길어서.." 그는 수습하는 듯 해명했다.
"하.." 이런 정신 나간 인간과 상식적인 대화를 하려고 한 행동 자체가 문제였던 것 같다. "하.." 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봐, 벌써 가려는 겐가?"
"딱히 여유가 있던 것은 아닙니다." 의미 없는 시간만을 날렸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어느새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도시? 내 눈의 도시? 쳇.." 내 푸념을 들어줄 이는 없었다. 그저 싸늘하게 밟혀버린 눈더미가 흩뿌려질 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무작정 나아갈 수밖에 없다. 다시금 난 걷고 또 걸었다. 이젠 빛마저 없는 정면을 향해 나아갔다.
무한히 이어지던 태양의 그림자가 저물고, 실낱같은 광명이 다시금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내 다리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걷는 게 맞는 건지조차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의식을 놓으면 냉기 속으로 파묻힐 듯이, 힘없는 걸음을 이어 나간다.
그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하나의 빛, 그리고 흘깃 보이는 잿빛 건물이었다.
"헉..헉.. 진짜 '도시'가.."
빨라진 발걸음은 점차 느려지고, 몸은 점점 내려가 눈을 해치며 기어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가까워져 보인 것은... 다소 익숙한 건물이었다.
"하, 실패인가."
돌아오고 싶지 않은 곳이 눈에 서렸다.
도망쳐 나온 곳으로 되돌아와 버렸지만, 이미 난 도망칠 힘이 없었다.
다행히도, 이곳엔 누군가가 이미 머물렀던 흔적이 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야영의 흔적에서, 난 다시 불을 피우려 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넌..!"
놀라서 음절조차 이루지 못한 목소리였지만, 난 그 정체를 안다.
어깨가 거세게 떨린다. 아니, 몸 전체가 심하게 떨린다.
방금까지 들리던 바람 소리도, 고드름이 떨어지던 소리도 모두 머릿속의 웅웅대는 소리에 먹혀버리는 중이었다.
나에게 먼저 뻗은 기만의 손길.
나와 처음 함께한 배신의 얼굴.
그렇다.
'그 아이'다.
"...아."
"침입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남자는 앞장서던 그 아이를 뒤로하고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무언가 막으려 시도한 아이의 시도는 무산돼 버리고야 말았다.
난 그에게서 도망쳤다. 이미 무너지는 근육을 딛고 난 달렸다. 하지만, 이미 붙잡혀 버리고야 말았다.
"가만히 있어!"
"크헉!"
눈밭으로 패대기쳐진 난, 3명의 얼굴을 보며 의식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
춥다. 너무도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