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동행
"이런 걸 굳이 살려놔야 되는 거야? 힘 쓰는 건 나 정도로 족할 텐데?"
"아니, 여러모로 이 자는 쓸모가 많아. 난 얘를 잘 알거든."
"인원수가 많아 봐야 좋을 게 있을까요. 이미 당신과 나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하.."
뜨거운 온기는 내 피부를 흔들었다. 타닥대며 불타는 모닥불은 이 장소와 이 무리에 대해 의문을 품게 했다. 어째서 여기 있는 걸지도, 어째서 이 자식과 함께하는 건지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난 눈을 떴다.
"아, 일어났냐? 꽤 오래 기절해 있더라고."
"묶어놓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 지 알아 'S'? 쓸모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힘을 낭비해도 되는 건가?"
"굳이 살려둔 이유는 있다. 뭐, 언젠간 말해줄게."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이 들려온다. S라는 단어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너흰 왜 여기 있는 거지?" 깊게 잠긴 목소리로 난 말했다.
"넌 거의 동사하기 직전이었어. 살려준 것만으로 감사해야지. 그리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갑지도 않은 건가?" 목소리에는 그의 여유가 드러났다. 듣고 싶지 않다.
"...이거 계속 묶어놓을 건가?" 난 불만에 차 말했다.
"너 멋대로 야영지에 처들어와 놓고 다시 나가려고? 가정교육은 받은 건가?" 날 공격한 사내가 말했다.
"이봐, 너무 말 심한 거 아닌가?" S의 표정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감정적으로 행동할 건가? 너의 그 태도가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잊었고?"
"잘못이 나한테 있다고? 진심이냐 'V'?"
"S를 너무 나무라지 마시죠!"
"닥쳐 'F' 이건 우리의 대화라고!"
그닥 듣고 싶지 않은 대화가 오간다. 귀 기울여봐야 고막에 부담만 갈 뿐이다. S, F, V로 이루어진 이 무리는 서로의 감정 소모 없이 순수 욕설과 비난만이 일어나는 버티는 게 힘든 공간같이 느껴진다. 마치 학창 시절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
웅성웅성대는 교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야, 너 진짜 멍청하다. 이런 것도 몰라?"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네. 하하!"
항상 그런 말들뿐이었다.
주변에선 비난만이 들려오고,
외로이 책상에 앉은 난 들을 수밖에 없다.
귀를 찌르는 희롱들과
마음을 찌르는 힐난.
뇌리에 박혀버린 아이들의 조롱은 한낱 눈 따위가 씻어버릴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봄부터 겨울까지. 등교부터 하교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처음부터 이어진 아이들의 놀이는 졸업 때까지 끝날 수 없었다.
시작한 건 끝을 보고 싶어 한 아이들은 끝까지 도달할 수 없었다.
끝이 없었기에.
끝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어지고 이어진 말들은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맴돈다.
...
이들은 아직까지 그런 말들을 이어가고 있다.
'집'에서와는 다른 감정이 들지만,
이게 '평화'가 아니라는 건 짐작할 수 있다.
오만에 찌들어 인정만을 바라는 사내도,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신격화하는 광신도도,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태양 같은 기만자도.
절대로 내가 경험했던, 바라던, 만들었던 '평화'에 가까워질 수 없다.
"그래서 D, 우리와 동행하지 않을래?"
"뭐?" 난 물었다. 갑작스레 생긴, 받고 싶지 않은 기회였다.
"이미 넌 몸이 약해져 있다. 우리와 동행한다면 길바닥에서 죽지는 않겠지." V가 조롱하듯 말했다.
S의 제안을 받고 싶진 않다. 어떻게든 자신의 무리에 끌어들여 사람들의 선망을 받고, 이후 날 버리려는 속셈이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티끌만큼도 변하지 않은 태도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엔 틀린 말은 아니다. 어쩌면, 한시적으로 합류하는 것도 좋은 계획일지도 모른다. 꺼져가는 불씨를 오랫동안 바라보던 난 고민 끝에 말했다.
"하.. 그래. 내키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럼 됐네. 합류한 걸 환영한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세월이 흘러 다소 투박해진 손은,
더더욱 잡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게 만들었다.
난 손을 잡지 않고 일어났다. 눈살을 찌푸리는 S의 얼굴이 보이지만,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일단 넌 하루 종일 잠들어있었지만, 우린 널 감시하느라 한숨도 못 잤거든?" S가 말했다. 실제로 떠오르던 해는 어느새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쉬고, 내일 목적지로 향하도록 하지. 다들 취침하는 게 좋을걸?" 그가 말했다.
거대한 빛들이 다 떨어지고, 작은 빛들마저 하늘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취침은 뒤로하고 다른 이의 취침을 방해하려 들고 있었다.
"하하하! 그러니까 얘가 너 학창 시절 친구란 말이지?"
있지도 않은 과거를 이야기하고.
"그래. 오래도록 친했지. 야구도 많이 했고."
그 이야기를 수긍하고.
"좋은 추억이었겠네요."
그 사람을 칭송한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다. 달갑지는 않다.
어릴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적어도 학생 때는 나아질 미래를 꿈꾸며 희망을 품었던 것 같은데.
천천히 그림자가 모두를 덮었다. 조용히 숨소리만이 들리는 모닥불의 중심에서 난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빛들이 수놓아진 고요한 캔버스는 빛을 꺼뜨리지 않은 채 자신의 검은색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무리는, 평화롭지 않다. 언젠가 꺼져버릴 별들이다.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태양이 모두에게 스며들었고, 나와 그들은 모두 준비를 끝마쳤다. 난 이제 걷는 건 지장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출발하는 무리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저흰 어디로 갈 건가요?" F가 물었다.
"아, 내가 너희에겐 말해준 적이 없네,
우리 지금 목적지에 서있잖아."
"...진짜? 여기라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
나와 그들은 입을 꺼내지 못했다.
높게 서 있던 익숙한 건물은 균열로써 채워졌고,
밝게 들어오던 빛은 꺼져버린 지 오래인 듯 보였다.
"여기에.. 들어간다고? 진심이냐?"
"난 진지해. 이곳엔 모두에게 필요한 게 담겨있어. 난 그걸 찾으러 온 거다."
손이 떨려온다. 뒷걸음질 치고 싶다. 이 건물은 그런 기분을 들게 만든다.
모든 게 시작했던 곳, 모두를 모이게 만든 곳.
그리고, 내 삶을 시작하게 만들어준 곳.
격리시설로, 우린 돌아왔다.
그렇게 우린 저물어가는 햇살을 뒤로하고, 시작의 그곳으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