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회귀

by Eian Lim

16. 회귀




또각.. 또각..

걸음걸이가 만들어내는 발걸음 소리가 고요를 해친다. 얼마나 사람의 손을 타지 못한 것인지 썩은 내 나는 피 웅덩이가 치워지지 않은 채 고여있었다.

찢어진 파이프에선 물방울이 떨어지고, 손전등을 비추자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먼지가 가득한 것이 보인다.

"진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줄이야..." V가 말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 누구도 이곳으로 돌아올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도망친 것도 아니기에 말이다.

"우선, 사람을 나누어 탐색한다. 그게 이 넓은 시설을 탐색하기에 용이하겠지. 특히 V, 이번이.. 너에겐 '기회'가 되지 않을까?"

"쳇, 그럼 난 먼저 가지." S의 말 한 번에 V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나도 딱히 이들과 함께할 이유가 없다. 말없이 깜빡이는 비상등을 향해 걸어갔다.

걸음걸이의 소리가 줄어든다. 고독한 발걸음만이 울려 퍼지고, 미약하게 빛나는 녹색의 비상대피등이 내 앞길을 비춰준다. 이 넓고도 거대한 건물에 깊게 드리운 어둠은 분명 한때는 밝았을 것이다. 비록 기분 나쁜 형광등일지라도, 이 건물을 밝게 비춰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게 무너졌다. 격리자들은 탈출했고, 감염자들은 파괴했다. 세계는 멸망했고, 근원지마저 책임을 물을 수 없을 만큼이나 망가져 버리고야 말았다.

"많이도 부서졌군" 내 목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비상대피등이 비춰주는 벽은 발톱 자국으로 가득했다. 근처에선 핏자국과 함께 깊게 파인 자국이 보였다. 익숙한 자국이었다.

"이곳에서.. 처음 함께했던 건가. 새록새록 하군."

얼룩진 깡통과 함께 모닥불의 흔적이 보인다. 이미 꺼져버린 지 오래인 나뭇조각들에선 온기 비슷한 무언가가 느껴지지만, 곧 사라지고야 말았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겠지."

난 그들이 무얼 찾는지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을 위해 힘써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즉, 스스로 원하는 곳을 탐색하며 시간이나 쏟아도 된다는 뜻이다.


익숙한 공포로 돌아왔기 때문일까, 아니 애초에 두려웠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뜨겁게 내뱉어진 숨결은 한기에 의해 연기로 탈바꿈한다.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발걸음도 점점 느려지고, 어느새 익숙했던 장소들이 스쳐 지나간다.

내게 주사를 꽂고 피를 뽑던 실험실과 매일 같은 식사를 제공했던 식당들이 보이고,

규칙적으로 배치된 창문으론 감염자들이 들쑤셔놓고 간 야외의 시설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반복되는 과거들이 지나가며 내 앞에는 가장 익숙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196883..."

언젠가는 알 수 있을 거라 여긴 내 번호이지만,

지금까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난 의문만을 남긴 방 번호를 뒤로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탈출할 때와 달라진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칙칙하고도 기분 나쁜, 그런 것들 말이다.

...

화장실에선 어둠이 흘러나온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행동임에도, 들어가는게 다소 꺼려진다. 하지만, 인간은 호기심이 앞서는 동물이다. 전등을 켜봐도 켜지지 않는 화장실로, 약간의 달빛에 의존한 채 몸을 넣는다. 화장실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빗방울로 인해 녹아내린 철창은 이내 녹물이 되어 창문을 덮어버렸다. 너무나 어둡고도 붉게 빛나는 화장실에선, 오로지 거울과 나만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나는 거울 앞에 선다. 언제부터인가 생긴 버릇이다. 세면대 위의 커다란 거울, 검붉은색으로 단 하나만을 비추는 그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거울 속 남자는 여전히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뭔가, 조금 달라 보인다.

이전보다 퀭해진 눈과 무거워 보이는 어깨의 사내는 창문의 검붉은 빛에 감화된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과 푸석해진 피부는 감정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아직 달라진 건 없다. 아직 눈은 검다.

하지만, 검은 건 눈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도 변함없이..


변함없이..


정상.. 인가?"


의문에 찬 목소리가 울린다.


"난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건가..?"

"이 세상은.. 내게 제대로 보이고 있는 건가?"

암묵의 침묵을 깨는 그 목소리는, 내재된 내면의 목소리들을 깨운다.


"절 죽인 게, 정말 당신이 원하던 평화로 이어지는 길이었을까요?"

선홍빛 꽃잎이 어깨 위로 떨어지는 듯하다.

땀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로 끈적해진 손은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역시, 널 믿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어. 너만 아니었어도 이런 결말을 맞이하진 않았을 텐데."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진홍빛이 밝아지는 듯하다.

한때 무너졌던 왼팔의 골격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D, 넌.. 어떤 세상을 보고 있는 거야?"

목에 걸린 목도리가, 목에 걸린 그날의 와인 빛 붕대가 점점 조여온다.

강렬했던 의지는 초라한 마음이 되어 멈출 수 없는 지진으로 이어지고야 말았다.


난 옳았어..


틀리지 않았단 말이야..


너희를 위했다고..


"그게 저희를 위한 일이라고요?"

뒷머리에서 피가 솟구치는 남자가 묻는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우리'?"

눈에서 피가 쏟아지는 사내가 묻는다.

"착각하지마. 그건, 네가 보는 세상을 위해서야."

붕대 감은 설교자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제발.


더 이상 내 손은 비어 있지 않았다.


제발..


파이프와 식칼은 붕대로 감싸져 하나가 되었다.


제발...


흘러넘치는 피는 웅덩이가 되고,


그만..!!!

이내 총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제발 그만하라고!!!!!!!!!


...


더 이상 피폐한 사내의 상은 맺히지 않았다.

대변을 위해 만들어진 거울엔 균열만이 맺혀있을 뿐이었다.

내 어깨의 짐이었던 적색의 환영은 사라졌지만,

진짜 짐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리 조각들이 손에 박혀 끈적이는 액체를 분출해 내고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난 틀리지 않았어.. 난 분명 옳았다고.. 너희를.. '우리'를 위해서.."

난 틀리지 않았다.

틀리지 않아야만 한다.

옳아야만 하고, 또 옳아야만 했다.

"그래.. 자료를.. 내가 옳다는 근거를.."

분명 감염자는 위험했다.

그래, 난 옳다.

이제 내 말을 대변해 줄 증거를 찾아야만 한다.

반드시.


방에서 뛰쳐나온 난 격리시설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격리자들의 방은 나중에 수색해도 된다.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어딨지.. 어딨는거냐 연구실은!!"

익숙했던 장소들이 멀어져간다.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어두컴컴한 장소로 달려온 난 목표를 발견했다.

"실험 자재 및 연구 자료 정리 시설."

많은 걸 함축한 듯한 이 기나긴 이름의 방에서, 분명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은 내 의지를 가로막는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쾅! 쾅!

쾅쾅쾅쾅쾅!!!


흩날리는 먼지와 함께 부서진 문으로 들어갔다.

전등 스위치가 들어올 리가 없었지만, 놀랍게도 비상등이 들어왔다. 기분 나쁜 검록색의 빛은 그나마 좁은 방에 불을 밝혔고, 종이고 전자고 가릴 것 없이 모든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초기 진척 보고서, 혈액 적정자 명단표, 프로젝트 총책임자 변경에 관한 서류..

중요해 보이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HIPV?" 난 이름을 찾는 게 아니다. 종이를 구겨버린 뒤 던져버렸다.

피실험자 명단.. 내 신상정보도 보인다. 196883 - D. 이미 알고 있는 정보다.

...

"테이프?"

'이거 오류가 있는 거 같으니 수정 좀 해주게나 - H'

오래도록 쓰이지 않은, 그러면서도 뭔가 중요해 보이는 테이프를 발견했다. 중요한 정보가 있으니 수정을 부탁하는 것 아니겠는가. 분명 뛰어 들어오며 스쳐 지나간 플레이어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감은 정확했다. 문 밖으로 나가자, 즉시 거대한 TV와 함께 수많은 의자가 놓여진 방이 보였다.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니 어디에 테이프를 삽입해야 하는지가 눈에 들어왔다.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 실험기록 10번 전염성 테스트 결과 보고. 이 바이러스는 간단한 접촉으로도..."

중요하지 않다.

"13번 진행 속도 테스트 결과 보고. 이 바이러스는 개개인에 따라 다른 진행 속도를..."

알고있는 내용이다.

"19번 총책임자 변경 안내.."

이미 봤던 내용이다.

...딱히 중요해 보이는 정보는 없는 것 같다.

"20번 위험성 테스트 결과 보고."

..!

나는 신경을 집중해 보기로 했다.

"....자간의 차이... 정리된건가?"

"네... 염자와 비발... '욕망'에서...감염자... 감염증세... 욕망이 발현.. 파괴성과 공포..."

...잡음이 너무 많다. 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은 듯했다.

"...비발현자의 조건... 의지의 초월..."

잠깐..?

"의지와 욕망... 구분이..."

의지?

욕망?

"...분 방법은-"

안돼.

들어선 안돼.

쨍그랑!

유리가 튀며 TV의 밝은 빛이 사라졌다.

급하게 일어나며 의자가 넘어졌다.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의자는 더 이상 편안한 자리를 내어주지 못했다. 리모컨을 든 손엔 식은땀이 흐르고 겨우 멈췄던 초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거면 된 거야.

이거면 된 거야.

감염자는 위험해.

이거면 된 거야.


의지와 욕망?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내 행동은 '의지'다.

욕망 아닌 의지였다.


한숨 쉬며 걸어 나온 난 다시 격리자들의 구역으로 되돌아갔다. 침착해지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기가, 그놈의 방인가."

원수의 방이라 할지라도, 탐사해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그의 방은 '격리자'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잘 꾸며진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몰락 귀족같이 특별대우 받는듯한 이 공간 자체가 너무나 흉측하게 느껴졌다.

구석에선 은은히 빛나는 물체가 보인다.

"이건.. 내 물건일 텐데."

너무나 오랜 기간이 흐른 과거의 산물.

아무리 그래도, 잊어버린 물건을 이놈이 보관하고 있었다니. 좀 당황스럽다. 상태도 좋아 보인다. 10여 년이 흘렀다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D..라고 쓰여있었군. 정말 오랜만이야."

그렇게 내 유일한 추억이자 과오인 나무 배트는, 내 손으로 되돌아왔다.

좀 더 둘러보니, 생각보다 다채로운 물건들이 보인다.

마치 의사처럼 가운을 입고 단체 사진을 찍은 S의 모습, 연구하다 일어난 폭발로 인해 새까맣게 돼버렸음에도, 헤실거리는 얼굴의 S, 보고 싶진 않지만 학창 시절의 단체 사진까지.

더 이상 볼 필요 없는 다른 이의 추억이 가득하다.

유의미한 물건만을 챙긴 채 난 방을 빠져나왔다.

"D! 여기 있어?" 날 부르는 그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고 나가자, 사진들의 주인공이 보인다. 걱정하는 듯한 얼굴은 조잡하게 꾸며진 듯해 보인다. 내 등에 걸린 배트를 보자 사색이 되었지만, 이내 진정하는 모습은 덤이었다.

"그건.. 아니야. 됐어. 바로 출발하자, D."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폐허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잠깐, 뭐야?!" 의문을 표한 나와는 달리 S는 경위를 아는 모양새였다.

"젠장.. 이제와서?.. 미친놈.. D! 어서 따라와라! 어서 빨리..


빨리 V를 찾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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