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맹목
하지만, 눈물이 흐르기가 무섭게 태도를 바꾼 사람이 있었다.
"그럼 이제,
D만 없으면 되네요?"
갑작스레 이어진 말, 그로 인해 형성된 정적.
나와 S 둘 다 상황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D만 없으면, 우린 함께 할 수 있어요..!
지금껏 쭉 참아왔는데.. 몇 년을 참아왔는데..!!
이제서야.. 이제서야 내 꿈이 이루어질 수 있어!!!"
"아니 잠깐, D를 죽인다고? 난 그럴 생각이 없어. 설마 이상한 계획을 꿈꾸고 있는 거라면, 멈춰주길 부탁할게."
"아니요? 제 몇 년간의 원대한 꿈을 버리라고요? 그건 안 되죠! 내가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무슨 일까지 저질렀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우리 목표는 실패했어. 여기를 탐험해서 얻은 건 V라는 허영의 종양이 잘려 나간 것밖에 없다고.. 이미 난 너무 혼란스러워.. 그러니까 제발, 아직은 아니야. 언젠가 함께 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야."
"..."
S의 말에 그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당신은.. 어째서 S와 함께하려는 거죠?"
뭐?
내가.. '함께' 한다고?
이.. 기만자와?
"야.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내가 이 자식과 함께하려 한다고?"
"아니라는 소리인가요? 진심으로 아니라면, 지금 떠나주세요."
"아니.. 그래도 갑자기 떠나는 건 너무 이르잖아.. D. 일단은 여기 있어."
"물론 내가 아직 혼자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고 보기엔 어려울 것 같은 건 사실이다만.."
떠나야만 한다.
달갑지도 않은 무리였다.
하지만,
'아직은' 떠날 수 없을, 그런 기분이다.
영문 모를 감정이지만,
난 끝을 보고 싶었다.
"난, 아직 떠날 수 없다"
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S와 나는 눈빛을 교환했지만, 난 그 의미를 알지는 못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진실의 눈을 열었다.
"S와 함께할 사람은 나야. 나여야 해."
그녀의 눈도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 감염자라고?
난 본능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충격에 휩싸여버린 S는 뒷걸음질 치다 주저앉아버리고야 말았다.
"왜.. 왜 너마저.."
진심으로 그녀에게 마음이 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믿었던 자의 배신이 못미더운것일까.
치이익...
"이제, 환각 속에서 허우적대 보시기를.."
그녀의 몸에서 나온 자홍색의 연기는 나를 덮쳤다.
마치.. '안개'같기도 하다.
익숙한 무언가와 친숙해서일까. 당황하지 않은 난 앞으로 나아간다.
이곳은.. 학교?
내가 다니던 학교의 모습을 한 장소에 돌아왔다. 어째서 그녀가 이 장소를 알고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곳을 보여주는 건가?
땡땡땡- 종이 울린다. 종이 울리고 잠시 뒤 아이들이 들어온다. 내 허리높이와 맞먹는 작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애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저곳엔 나도 있다.
하필 반에 한가운데 자리에 배치되었던 난 모두와 떨어져 있었다. 꼭 아이들은 교실 앞과 뒤에 몰려 놀곤 한다.
"바보, 너 진짜 멍청하다. 이런것도 몰라? 어제 배운 거잖아. 이렇게 이렇게 하면 풀릴걸?"
"아싸 이겼다! 넌 역시 보드게임에선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 뭐, 많이 하다 보면 늘겠지! 다음 판 간다!"
아이들은 자신의 특성과 개성에 맞는 아이들과 무리를 지어 하나가 된다.
공동체를 만든 아이들은 그 무리에서 소속감을 느낀다.
그들끼리 떠들고, 그들끼리 논다.
무리에 끼지 못한 아이는 배척하며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D. 아까 체육 때 넘어졌는데, 괜찮아? 다치진 않았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실 기억할 필요가 없는 한 아이가 말을 걸어온다.
"응. 괜찮으니 신경 꺼."
어차피 모두들 날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모두가 날 외면하고 경시한다.
어차피 모두가 날 배척하고 외롭게 한다면,
난 혼자가 되기로 했다.
"으..응.. 알았어.." 그 아이는 내 말과 함께 떠나갔다.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온다.
드르륵!
"안녕!~ 타반 출입이에요!!"
"오올 S! 이번엔 누구랑 놀려고 온거냐?"
"난..
이친구!"
그가 잡은 손은 나의 손이었다.
"난 동의한 적 없-"
"에이, 노는데 상대가 누가 중요해! 즐거우면 된 거지!"
"S! 쟨 아까 넘어져서 아플 거야. 운동장에서 노는 건 어려울걸?"
뭐지..?
잘..해주는건가?
왜지?
어째서?
애들은 나에게.. 잘해줬던건..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건..이건..
"진실이 아니지."
숙여져 있던 아이의 얼굴이 들어 올려지고
나와 나는 서로를 마주한다.
"넌.. 뭐가.. 무엇이 '진실'이라고 생각해?"
"..."
"대답해줘. 어차피 나는 너, 너는 나야."
"진실은, 어렵지 않아.
너가 느끼는게, 너한테는 '진실'이 되는 거야.
너가 보는것이, 너한테는 '진실'이 되는 거고.
너가 믿는것이, 너에게의 '진실'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봐."
어린 나는 말했다. 주변의 아이들은 나와 멀어져 있다. 무리지어.. 놀고있다.
"이게, 너의 진실이야"
"...
진실은, 내가 만들어 나가는 거라고?"
"넌, 지금 이걸 듣는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손은 맹렬히 들어 올려진다. 빠르게 휘두른 주먹은 환영을 치기엔 역부족이었다.
"너의 의지와 욕망.
무엇이 널 움직이는 걸까?"
아무리 내려쳐 봐도 내 손은 닿지 않는다.
"언제까지 외면할 순 없어."
떨리는 손은 더 이상 주먹을 쥐지 않았다. 난 눈을 감아보았다.
내 행동은..
"의지야."
"..."
"분명 의지야."
그 말을 끝으로 난 환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S는 반쯤 눈을 막은 채 F를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젠장!! 왜 이걸 보여주는 거냐.. 격리시설을.. D를...!!!"
그의 눈동자는 나에게로 향한다.
"D.. 넌 이게.. 보이지 않는 거냐?"
"널 들쑤시는 과거 말이냐?"
"그래! 넌 트라우마가 없나?"
난 괴로워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뭘 느끼며 살아왔는지,
알고서 말해야지.
"S"
내 인생에 흉터를 남긴 존재.
"네가, 내 트라우마다"
"..."
...
"진심..이냐..
하하.하하하.
그거 알아?
그냥 저년 죽여버려.
너도, 나도, 아픈 과거를 들쑤시면서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까 제발!!! 저 안개의 근원을 죽여달라고!!"
"그럴 참이었다. '감염자'니까."
역시 넌 선의 따윈 없는 인물이었어.
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날 죽이는 이유가 뭔가요.
죽이려는 이유가 뭔가요."
"마지막은 편히 보내줄게.
S가 시켰기 때문이야."
"하...
드디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너무 기뻐.. 행복해..
드디어.. 날 봐준 거구나..
당신이 보는 앞이라면.. 기꺼이...
크억..
끅..... 얽.. 엌....
크억... 컼....
어....."
인지해 준 것 하나에 기뻐하다니.
V고 F고 자신들의 욕망을 바란다.
너무나 맹목적으로, 욕망만을 바란다.
"...D. 고맙다."
난 그의 감사에 침묵으로 응했다.
한순간에 구성원을 두 명이나 잃은 우두머리의 기분은 어떨까.
"뭔가.. 씁슬하네.
이렇게 될 거라곤 예상하고 있었다만."
...
"왠지..미안하기도 하네. 나만을 바라봐 준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장례라도 치러줄 셈인가?"
"마지막은.. 화려하게 보내줘도 되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말했다. 잔가지들을 주우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