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보인자'
내 몸은 무거웠다. 지금껏 쌓여온 무언가가 내 몸을 짓누르고 있다.
피로일지도, 고통일지도,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무거운 몸을 이끌어서라도
내 앞의 존재를 척결해야만 한다.
내 의지의 결과를 위하여.
내가 지키는 세상을 위하여.
"잠깐, D..? 지금 뭐 하는 거야?"
"넌 언제나 그랬어. 10여 년 전이랑 추호도 변한 게 없군!! 기만과 위선, 부정으로 뭉친 너 같은 사람이 진짜 '괴물'인 거야."
"아직까지 그 이야기인가? 그래, 난 너의 과거를 이해할 수 없지. 난 너의 눈으로 세상을 본 게 아니니까."
젠장, 젠장, 젠장!
"그 입 다물지 못해!!!!"
"내 말 안 끝났다!! 그래, 경험도 세월도 다르지. 우린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어. 아니,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그렇겠지. 하지만, 서로 공감쯤은 할 수 있잖아.. 과거의 고통과 기쁨을 나누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거라고.."
"과거고 평화고 이젠 다 필요 없어!!!!! 넌... 넌.. 내 인생의 과오다!! 널 만나선 안 됐어!!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도 전부 너 때문이다 S!!!!"
"과거는 과거다, D!! 언제까지 어린아이처럼 얽매일 셈이냐!!!"
강하게 다물어진 이들은 빠득거리며 갈리기 시작하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려오기 시작한다.
"S. 기억나? 우리의 '야구'?"
"...당연하지."
"그래.
우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혈투'를.. 이제부터 시작하자."
...
둘 다 주먹으로 시작한다.
"넌 왜 싸우려 하는 거냐! 대화로 해결할 순 없는 건가?!"
"닥쳐 닥쳐 닥쳐!!!"
퍽! 퍽!! 퍽!!!
아무리 발악해도, 신체적으로 따라갈 수 없었다.
"넌 아무리 해도 날 이길 순 없어!! 포기해 제발!!"
그는 날 멀리 던져버렸다. 땅바닥을 구르면서도, 머리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저걸 이겨야만 한다. 죽여버려야만 한다.
강한 마음은, 강한 힘을 준다.
이젠 더 이상 안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 수 앞'은 점차 선명해져 온다.
나의 소중한 '명분'이 되돌아왔다.
이젠 가벼워진 발과 함께 난 굳세게 나아갔다.
공격이 점차 선명하게 보인다. 어디로 주먹이 올지, 어디를 다리로 막을지, 어디를 맞춰야 큰 피해를 줄지가 점점 선명하게 보인다.
"젠장, 진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원하는 건가?"
"명제가 틀렸군, S. '죽이는' 싸움이다! 죽는 건 계획에 없지!!"
점차 무거워지고 두꺼워지는 S의 피부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수십 번 주먹이 오가고 수백 번 공격이 오간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넌 날 못 이겨. '절대'로 말이야."
왜 그런 극심한 실험을 당했는지 알 것 같다.
뻗어 나오는 신체는 상처를 즉시 수복했고, 그가 원하는 모양으로 변모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이제 내 앞에 있는 건 평범한 위선자가 아니었다.
"이제, 이걸로 끝이야."
말 그대로 날아오른 그는 공중에서 머물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의 천사처럼 날개를 달고 있는 그는
더 이상 감정이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그 얼굴은, 다시 한번 날 분노하게 만들었다.
"네가 창공을 누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날개를 달았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저
신마저 기만하는 천사가 날아올랐을 뿐이다!!!"
"그럼 맨주먹으로 천사를 상대하겠다는 말이냐?"
난 손을 등으로 옮겼다. 급조했었지만, 아직도 잘 걸려있다.
10여 년 전에 가졌던 마음.
유일한 추억 아닌 추억.
그날의 과오.
내 손엔 어색하게 야구 배트가 들려있다. 배트를 들기만 했음에도,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야구공이 날아가는 장면도, 소년이 공을 던지는 장면도, 그가 생일 선물로 배트를 사주었던 것도, 하나의 역사가 되어 내 머리에 각인되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서사가 머리를 가득 메운다.
더 이상 내 야구 배트는 어색하지 않다.
마음을 다잡은 날 본 천사의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웠다.
우린 서로에게 달려들어 맹공을 펼쳤다.
그의 날개는 날 감싸고 공격했지만, 배트로 대부분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날개에 마저 적응한 그는 더욱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봤던 그 무엇보다 강했다.
눈 깜빡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인지, 혹은 날 제압하겠다는 욕망인지, 한 수 앞을 내다볼 수 있었음에도 정작 한 치 앞의 상황을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어째서, 어째서 내가 한낱 날개 단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걸까.
난 눈을 감았다.
...
잠시후 눈을 뜨니, 주변은 쓰디쓴 흰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그곳에서 울리는 내 발걸음은 누군가의 목소리들이었다. 하나같이 내 시선을 비난하는 허울들이다.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내 손에선 물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방울 두방울 세방울,
그리고 한명 두명 세명.
물방울은 이내 핏방울이 되고,
핏방울은 이내 웅덩이가 된다.
호수가 되어버린 진홍색 위에선,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짙은 붉은색 위에선 눈의 색을 확인하기란 어려웠다. 다만, 사내의 얼굴은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앞을 봐."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거운 머리를 들어서 본건 나였다.
"넌, 뭘 보고 싶은데?" 그 아이는 물었다.
... 답할 수 없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넌.. '진실'을 보고 싶은 거지?"
...
"진실은 그 무엇보다 가까이 있어. 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봐."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한 수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기르도록 해!" 날갯짓의 소리가 스며들어온다.
...
한 수.. 앞...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전투에서,
한 수 앞을 바라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말했잖아, 답은 멀지 않다고."
어느새 주변은 감미로운 와인으로 물들었다.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날 바라보고 있었다.
...
그랬던 거였다.
아주 쉬운 답이었다.
어른은 나를 쓰다듬었고,
나는 아이를 쓰다듬었다.
"그를 이기기 위해선,"
우리의 얼굴엔 미소가 드리웠다.
"두 수 앞을 보면 되는 거였어."
내 앞의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평화를 향한,
뛰어넘고자 하는,
죽여버리고픈
내 마음,
내 욕망,
내 '의지'.
내 눈은 떠졌다.
이제 보인다.
그가 어디로 달려올지가,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가.
드디어 난 맹공에 반격하기 시작했다. 닿지 않던 팔다리엔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배트로 공격받는 그의 얼굴에선, 씁쓸한지 비통한지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의 나에겐 그저 빈틈이 되었을 뿐이다.
다리를 붙잡고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평선을 넘어가는 태양과 함께, 하늘에선 눈송이가 빗발치기 시작한다.
흐려지는 시야 때문인지 욕망의 천사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절대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얼마나 가격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무 배트로 계속 공격했다. 그때의 기억이, 그날의 기억이, 그자의 기억이 끝없이 타격으로 이어졌다. 결국 나와 그는 지면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난 그를 위에서 짓밟고 있었다.
눈가에 흐르는 투명한 물방울을 닦아내며 그는 말했다.
"넌.. 네 행동이 뭐라고 생각해..?"
대답할 이유조차 없는 질문이다. 난 그저 배트를 그의 가슴팍에 얹어놓는 행위로 응했다.
"하하, 하하.."
...
"결국 너도 다르지 않았어.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르는 존재들일 뿐이었던거야.."
...!!!!!
"우리는 보균자, 아니... ‘보인자’에 불과할 뿐인 거야!!
하하! 하하하하하!!"
난 그의 눈물을 거세게 내려쳤다.
능력을 활용해 금세 재생한 그는, 그 멈출 수 없는 새치 같은 혀를 나불대기 시작했다.
"너도 결국 너의 욕망밖에 바라보지 못한 거야..."
쾅.
욕망?
쾅쾅쾅.
이건 내 의지야.
쾅쾅쾅쾅쾅.
내가 만든 평화고,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내가 본 결과를 일궈낸 것뿐이다.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이건 내 선택이다.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널 뛰어넘으려는 '의지'이고,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널 죽이려는 '의지'이다.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죽어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죽어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죽어
...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
쾅.
더 이상 의지고 욕망이고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내리쳤을까,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셀수도 없다.
내 발아래의 무언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저 한 시대의 일부가 되어버린 찌꺼기에 불과하다. 부서져 버린 야구 배트로 일궈낸 하나의 살덩이는 그저 흐물거리고 있었다.
"이건 내 결정이야."
붉은 액체가 터지며, 뾰족한 모서리에 찔린 찌꺼기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어느새, 난 웅덩이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끈적이는 와인으로 뒤덮여 버렸지만, 오히려 가볍다.
마치 은은히 올라오는 술기운에 취한 듯, 몸도 마음도 너무나 가볍다. 하늘에서 내리는 싸늘한 눈은 분명 따스하게 모든 걸 덮어버릴 것이다.
어두워져만 가는 하늘은 도리어 내 마음을 밝게 비춘다.
이제,
"돌아가자,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