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착
익숙함이라는 기분이 싫은 건 아니지만, 예지몽 없이 일어나는 것도 꽤 괜찮은 것 같다. 오히려 더욱 푹 잔 기분이기도 하다. 창밖을 보니 흔들리는 창문 뒤로 흩날리는 낙엽들이 보였다. 너무나 고요했다. 어떤 위협이 오더라도, 건물에서 가장 높은 이곳은 안전해 보이기도 했다. 창에서 눈을 돌리자,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누웠다. 평소 같았으면 누릴 수 없는 이 안정감에, 난 조금 더 눈을 붙이기로 했다.
다시 일어나 시계를 보니 이미 10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방에 걸려있는 수많은 옷들 중 사람들 눈에 가장 불편해 보일 옷을 입고 거실로 향했다.
"오늘도 정장인 거에요? 불편하진 않으세요?" M이 친근하게 물었다. 보통이라면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는 신경을 긁지 않으며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니, 제일 편한 걸 입는거야."
"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사실, 어제 좀 더 찾아봤는데, 적절한 크기의 옷이 없더라고요."
아직 잘 모르는 나에게마저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에게선 기만의 면은 보이지 않았다. M과의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요리 중인 T에게로 다가갔다. 아직 대학생처럼 보이는, 다소 미숙해 보이는 그였지만 무리를 위하여 성실히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뭐야?" 옆에서 함께 다가온 M이 물었다.
"아, 이제 이건 아침이라기엔 점심에 가깝지만.."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던가? 아무튼, 그럼 점심은?"
"어제 K 씨가 간략하게 조리하면 먹을 수 있는 통조림들을 가져왔더라고요. 그래서 스파게티나 미트볼같은 요리를 하고 있었어요."
스파게티와 미트볼, 평범한 음식들이다. 하지만 평범함도 상황에 따라 특별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맛있겠네. 기대하고 있을게." T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아니에요. 이거라도 뭔가 무리에 도움을 준다는 게 기쁠 뿐이에요."
마지막으로 집에서 식사를 한 게 언제였을까,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애초에 집이 어딨었는지, 어떻게 생겼었는지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더 이상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그곳이 어디든, 정착하게 된 장소가 새로운 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머리에 흰 꽃은 뭐야?" 난 그에게 물었다.
"아 이거요? 아까 J가 오랜만에 보는 이쁜 꽃이라며 꽂아주고 가더라고요."
꽃. 연약해 보이는 그 꽃은 연약해 보이는 남자아이의 머리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점심이 다가오자, K가 돌아왔다.
"오늘은 좀 일찍 왔네. 괜찮은 걸 꽤나 건져서 말이야." 그는 말했다. 실제로, 오늘의 보급품들은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간단한 상처를 치료할 의료품들, 또 널널한 유통기한을 가진 음식들, 그리고..
"이건 게임기.. 인가요?"
약간 당황한 나는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말했다.
"확인해 보니 이 집엔 성능 좋은 태양전지가 있더군. 작동할까 싶어 옛날부터 궁금하던 게임기를 가져와 봤지."
그와 나는 설치를 고민하다 결국 가장 넓은 3층에 설치하기로 했다. K는 설치 이후 플레이 해보지도 않은 채 잠시 잠을 청하러 갔다. 반나절을 꼬박 탐색과 정찰에 소비했으니 분명 피곤할 것이다.
난 게임기 앞에 앉아 컨트롤러를 잡았다. 오랜만에 켜는 게임기는 켜지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전원이 켜지고, 난 즐겁게 시간을 허비했다. 시간이 남아돈다는 게, 이렇게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것일 줄이야. '이념의 기사들'이라는 게임을 했는데, 꽤 나쁘지 않았다. 다만, 자유를 말한다는 것 이외엔 와닿는 건 없었다. 어느 때보다 난 자유로워졌으니 말이다.
점심이 되자 우린 거실에 모여 식사를 했다. 얼마 만에 먹는 평화로운 식사인지 모르겠다. 아마 그들도 나와 동일한 생각을 할 것이다.
"오늘은 정말 평화롭네. 앞으로도 이랬으면 좋겠을 정도로." J가 말했다. 약간의 찰과상을 입은 K를 치료하며 말이다. K는 고통을 느끼는 듯 보였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생각보다 주변엔 감염자가 없더군. 물론, 사람 자체가 없었지만." K는 말했다. 덧붙여, 감염자들의 폭주의 영향이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 같다는 추측을 했다. 그가 주변을 탐색하고 분석한 결과인 듯싶다.
다양한 징조들이 이 주변을 안전지대라고 말하려 하고 있다. 그토록 우리가 힘들게 찾아왔던 거주지, 아니 '집'은 헛되지 않은 것이다. 우린 이곳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T, 이건 뭐로 한거야? 분명 재료는 똑같은데 내가 하는 거랑 다른 맛이 나네?" 요리에 자부심을 갖고있던 J가 물었다. "그냥 불을 좀 더 강불로 해서 빠르게 익히고, 이후엔 식히면서 소스가 잘 스며들게 한 거밖에 없어요.. 별로인가요?"
"아니, 오히려 더 맛있어서 그래. 너한테 요리를 맡긴 건 참 잘한 거 같아."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드리웠다. 칭찬을 받은 T도 기뻐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M이 보이지 않았다. 위치를 모르는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린 알고 지낸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그를 찾아 온 집을 들쑤시고 다녔다. 1층의 K와 J의 침실도, 거실도, 2층의 부엌, T와 M 본인의 방에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3층, 내 방이 있는 곳이다.
"M! 어디 있어? 설마 밖에 나간 건가.." J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리 위험 요소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밖에 나가는 건 안전하지 않아. 가능한 한 빨리 M을 찾아야 한다." K가 칼같이 말했다.
바깥에 언제 누가 돌아다닐지 모르는 이 세상에서 혼자 나갔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비록 만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그의 선의엔 위선 같은 건 보이지 않았기에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장소에서 M이 등장했다.
"아니, 왜 멀쩡한 사람을 찾고계세요? 곧 돌아갈 거였는데." 그는 내 방 한쪽에서 나오며 말했다.
"... 지금까지 뭐 하고 있었어?" 어이없다는 듯 J가 말했다.
"아니, 아저씨 방에서 한기가 내려오길래 보니까 창문이 부서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고치기로 했죠. 근데 처음 해보는 거라서 좀 오래 걸렸네요." 그는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렸다. 우리 모두 안심하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걱정했거든요. 창문도 다 고쳤으면 다시 내려가서 점심이나 먹을까요?" T가 외쳤다. 우린 그 말을 따라 다 같이 1층으로 내려갔다.
내 방의 창문이라, 어제는 정신없이 잠드느라 추운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M은 생각 이상으로 주변을 신경 쓰고 챙기는 타입인 듯하다. 잠시 흘겨본 창문은 그리 완벽하게 고쳐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를 위해 이런 노력을 해준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다.
우린 내려가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넓지는 않은 식탁이지만, 잡담과 농담의 판이 커져갔다. 비록 만난 지조차 얼마 안 된 사람들이어도, 지금은 이렇게 마주 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뿐이다.
비록 난 역할 같은 건 배정받지 못했다. 다만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행복을, 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어이! D! 안 내려오고 뭐 해!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고!"
M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젖어든 추억에 헤어 나오지 못했나 보다. 이 집에 온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몇 주일 수도, 몇 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만은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다. 내려가서 점심식사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