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평온

by Eian Lim

4. 평온




이 집에서 오랜 기간을 지내며 알게 된 사실은, 꽤나 잡동사니가 많다는 것이다. 최근엔 집의 창고 구석에 놓여있던 TV를 발견했다. 생각보다는 큰 사이즈였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나 의문이다. 그래서 오늘 K는 TV를 작동하기 위한 안테나를 구하러 나갔다고 한다. J는 오랜만의 낮잠을 청하고 있고, T는 남은 잔반들을 처리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점심을 먹으며 M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긴 의문이 있다.

"근데 사람들이 없는데 안테나를 구한다고 TV가 작동을 하나?" 난 의문에 찬 채 물었다. M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얼굴로 고민을 시작했다. M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T가 나타나 말을 이었다. "그러게요. 전기 생산 시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곳도 운영을 멈췄을 거 같은데, TV가 작동을 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말문을 뺏긴 M은 "으아! 할 말을 까먹었어!" 라며 소리쳤다.

식사를 마친 이후, 식기를 정리하며 골똘히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이 집 어딘가에 달력이 있어, 우린 매일 날짜를 체크하며 지내기로 했던 것 같다. 깨끗해진 식기를 얹어놓은 뒤 달력을 찾아 나섰다. 다행스럽게도 달력은 부엌에도 있었다. 오늘이 몇 월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X 표시가 60개 정도 되어있는 걸 보니 어림잡아 두 달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 오래 보낸 것 같지 않은데, 시간은 참 빠른 듯싶다.

이후는 생각보다 평온하게 지냈다. 소파에 앉아 졸거나, T에게 저녁 메뉴를 권유하거나, M과 게임을 하는 등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보낸 것 같다. 두 달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은 나를, 우리를 이곳에 적응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우리의 삶이 이곳에 익숙해졌고, 지금은 매일매일이 일상처럼 느껴진다. 분명 시설을 탈출하며 죽을뻔했던 기억이 생생함에도, 지금은 다소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K가 돌아왔다. 그의 손엔 작지 않은 안테나가 들려있었다. "그럼 이제 설치해 볼까?" 새로운 가구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보이는 목소리였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상에 올라가 안테나를 설치했고, 안타깝게도 그의 노력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전기랑 통신은 별개인 거 아니었나.." 지지직거리는 TV 뒤로 그는 체념한 채 중얼거렸다. "안될 건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네. 이미 실패한 것에 너무 매달리는 것도 좋은 선택을 아니겠지." 그의 목소리에선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실패했더라도, 이 공간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목소리였다.

다같이 모여 T가 만든 저녁을 먹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따뜻하고 화목한 밥상이다. TV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다소 아쉬울지라도, 이렇게 평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가며 다양한 대화가 오갔지만, 그 대화들은 한마디로 끝나버렸다.

"그런데, D 씨의 옛날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네요?" M이 말했다.

갑작스러운 정적. 모두들 서로를 둘러본다. 다들 동의하는 눈치다. 실제로 이미 다들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K는 자신이 군인 출신이라 처음부터 밝혔으며, T는 자신이 대학생이었음을, M은 대학을 갓 졸업한 취업 준비생이었음을, J 또한 간호사 일을 하다가 왔다는 사실을 밝혔었다. 오직 나만. 나만 과거를 밝히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땐 과거를 밝히고 싶지 않았고, 시간이 흐른 지금은 타이밍을 놓쳤다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리 말하고 싶은, 긍정적인 과거 또한 아니기에 말이다. "지금까지 계속 궁금했었어요,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T가 공손하게 물었다.

여기서 더 부정한다면, 오히려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답해주는 게 좋을 수도 있다. 난 숨기고자 했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래.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이야기해 주지. 잘 들어봐.

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어.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지. 하지만, 내 평범함에 이유도 없이 거리낌을 느끼는 애들이 생겨났어. 결국 난 어릴 때부터 사회와 거리를 둔 채 지내게 됐지. 그중에서 딱 한명은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어. 하지만, 그 또한 그저 날 희롱하기 위해, 우롱하기 위해 뻗은 기만의 손길이었어. 그 아이는 주로 나와 야구를 했고, 항상 내 실력을 조롱했지. 다른 친구들과 함께일 때는 나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말이야. 그냥, 걘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아이였던 거야."

또다시 정적이 흐른다. 다들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후 홀로 성인이 된 난 어찌저찌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고, 취직하고선 그냥 평범하게 생활했어. 누구도 나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았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자리임에도 별생각 없이 지낼 수 있었지. 그때부터 정장이 익숙해지기도 했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서 바이러스가 퍼지고, 비발현자라며 격리시설에 수용되게 된거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그걸 들은 저들의 표정은 어떨까? 다른 사람들처럼 무의미한 공감만 해주려나? 그 아이처럼 희열감에 조롱하려나?



"주먹 좀 푸세요.. 아프지 않으세요?" T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그러다 피 나겠다. 너무 과거를 생각하지 마." J가 말했다.

"현재를 즐기면 되지!" M이 외쳤다.

"맞아. 우린 과거에 얽매일 필요 없으니까." K의 낮은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들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슬픔도, 기쁨도 없는, 평범한 표정.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그들의 말에, 손에 들어간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 꺼낸 이야기였지만, 그들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남은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새 달이 떠오르고, 난 침대에 누웠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중엔 과거의 기억도 있다. 무리에 소속되지 못했다는 고독감. 아무리 다가가도 멀어져만 가는 아이들.

...

과거에 얽매일 필요 없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잠시 접어둔 채 이불로 내 몸을 감싼다.

이곳은 너무나 평온한 곳이다.

난 이 평화가 오래 이어지기를 희망할 뿐이다.


이전 04화3. 정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