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안개
정신이 몽롱하다. 눈앞은 안개로 덮여있고, 주변이 흐리게 보인다.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가고, 고개를 드는 것조차 버겁다.
익숙하다. 이건 꿈이다. 격리시설에서부터 꾸던 그런 꿈. 이 꿈이 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어쩌다가 한 번씩 일어나는, 소위 말하는 '데자뷔'가 느껴지는 그런 꿈이다. 그래서 난 이 꿈을 '예지몽'이라고도 부른다. 시간이 지나며 안개가 조금 걷혀졌다. 그래서 난 이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분명 한동안은 꿈조차 꾸지 않았었다. 꿈을 꿔본 건 격리시설에서가 마지막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시 꿈을 꾸게 된 것일까.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지금은 그걸 생각할 틈이 없다.
조금 걷다 보니 안개가 점차 거둬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공간은 내 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인진 모르지만, 날 덮쳐오는 불안감을 피해 난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자 3층의 구조가 훤히 보인다. K가 안테나를 설치하러 나갔던 베란다와 TV를 발견한 창고, 그리고 화장실도 눈에 들어온다. 3층엔 큰 볼일이 없다. 하지만, 화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화장실에 들어온 난 여느 때처럼 거울을 본다. 검은 눈에 창백한 피부, 평소와 같은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 얼굴은 누군가의 피로 가득했다. 붉게 칠해진 저 얼굴은 진정된 모습이 아니었다. 아래로 향한 시선엔 내 두 팔이 위치해 있었다. 내 왼팔은 마치 부서진 듯 뒤틀려있었고, 오른손엔 날카로운 선홍빛의 식칼이 들려있다. 얼굴뿐 아닌 팔과 몸, 칼에 모두 붉은 액체가 덮여있고, 아직도 따뜻하게 내 몸을 감싸온다.
숨이 점점 가빠온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오른손의 식칼이 달그락거리며 소리내기 시작한다. 왼팔의 고통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다. 내가 누굴 찔렀나? 누굴 죽인 건가? 이 식칼로 찔러서? 어떻게? 왜?
머릿속이 혼잡하다. 아무런 판단이 되지 않는다. 의식이 흐려저 간다. 몸이 흔들린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날, 누군가가 거세게 흔들고 있다. M이었다.
"너 열 엄청나더라. 식은땀도 많이 흘리고, 괴로워 보이길래 일단 어쩔 수 없이 깨워봤어."
아직도 심장이 거세게 뛴다. 앞을 보려고 해보지만, 초점이 맞지 않는다.
M 덕분에 어느 정도 진정되자, 나는 그에게 물었다. "오늘 다친 사람 있었어?" 너무나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면서도, "오늘은 아무도 없었는데? K도 무사히 돌아왔고." 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왜, 무슨 일 있어?" 그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은 예지몽이 아닌, 그냥 악몽이었을 것이다.
M에게 잠시 내려가달라 부탁했다. 잠시만 혼자 있고 싶었다. 이런 꿈은 처음이었다. 다시 누워 진정을 위해 잠을 청해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난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기 위해 다가갔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떨린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그 불안감이, 날 덮쳐온다.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문고리를 돌렸다.
바깥은 평범했다. 내가 긴장하던 것이 무의미하다는 듯,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화장실로 향해보았지만, 거울에 비친 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피 또한 묻어있지 않는, 평범한 모습. 안심한 나는 2층으로 내려가 나머지들을 살피러 갔다. T는 부엌에서 요리 중인 채 달려오던 날 바라봤다. "어? 일어나셨어요? 오늘은 늦게까지 주무시길래 일부러 4인분으로 요리했거든요. 바로 해드릴게요." 그가 말했다.
"너,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아픈 데는?" 난 외치듯이 물었다. "어.. 기침이 좀 나오는 거 빼면 괜찮아요. 어젯밤이 좀 추웠어서.." 그가 말했다. 확실히, 정말 아무런 꿈도 아니었나 보다. 괜한 걱정이라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 점점 호흡이 안정되어 가며,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아? M 말로는 네가 열이 심하게 난대서." J였다. 그녀는 간호사라 말했던 것처럼 내 이마를 짚더니 "뜨겁긴 하지만, 감기는 아니야. 그냥 몸이 좀 피로했다 생각해."라며 가볍게 말했다. 그녀도 의자에 앉아 물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난 애써 숨기며 말했다. "아뇨, 그냥 일어나니 불안불안해서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렇게 그녀는 T에게 어제 남은 음식이나 먹겠다며 부탁했다. T는 새로 해주겠다며 가벼운 언쟁이 시작됐다.
가볍게 넘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은 점점 흐려지기 마련이다. 난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꿈을 곱씹을 동안 저들의 언쟁은 T의 승리로 끝나 J는 새 요리를 먹게 되었다. "재료 낭비라고 몇 번을 말하니.." 맛있게 먹으면서도 투정이었다. "전 항상 새로 한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고요." T가 덧붙였다. 나도 그의 성의를 맛있게 처리했고, 간단하게 설거지를 마친 뒤 소파에 앉았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자, 나는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D! 좀 도와줄 수 있어요?" T의 목소리였다. 의문을 품고 일어나 가보니 그는 냉장고를 옮기는 중이었다. "이게 너무 무거워서요. 같이 옮겨줄 수 있어요?" 그의 말과는 다르게 냉장고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별로 무겁진 않네. 이 정도면 나 혼자도 괜찮아. 넌 힘쓰지 말고 좀 쉬고 있어." 난 그의 얼굴도 보지 않고 냉장고를 옮기는 걸 끝마쳐버렸다.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T가 보이지 않았다. J가 그 대신 요리하면서 T가 아프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후 난 자기 전 T의 방에 찾아갔다.
"T? 있어?" 가벼운 노크와 함께 그를 불렀다. "네.. 들어오세요.." 기운 없는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문을 열자, 기침을 반복하는 그가 보였다. 괜찮냐며 물었지만, 그렇다는 답변만 반복할 뿐이었다. "오늘은 창문 닫고 자. 넌 몸도 강하지 않으니까, 조심하라고 J가 그랬잖아." 내가 강조했다.
"나도 약하진 않다니까.."
"응?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가 들렸던 것 같지만,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T 방의 창문을 닫으며 나왔고, 내 방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꿈을 꾸지 않기를 희망하며 말이다. 달빛이 비추는 내 방으로 돌아와 베개에 내 머리를 기댔다.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 다가온 건 졸음과 잠뿐만이 아니었다.
안개가 내 앞을 막는다. 또다시 꿈을 꾸는 것이다. 다시 무의미한 걸음을 시작했다. '그 꿈은 아니겠지. 그냥 평범한 꿈일 거야.' 라 되뇌이며 말이다. 그러자 안개가 조금 거둬진다.
거둬진 안개 속으로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계단이 보인다. 평소보다 어두워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3층이었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 2층으로 갈 수 있다. 2층엔 부엌이 있고, M의 방도 있다. 그리고 T의 방도..
난 천천히 계단을 향해 걸음을 이어간다. 한칸 한칸 밟으며 기분 나쁜 삐걱거림이 이어진다. 삐걱, 삐걱, 반복되는 소리와 함께 2층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평소보다 어질러진 모습이, 다리가 부서진 식탁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안개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보인다. 겉모습을 보니, 대학생 남자 정도로 보인다.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만이 뇌리를 스칠 뿐이다. 난 조용히 발걸음을 이어 나간다. 잔재하는 안개를 손으로 밀어내며, 밀려나지 않는 안개 속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젠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그러자 들리는 누군가의 비명. 기다림을 깨는 그 비명과 함께 안개가 거둬지고, 바닥에 엎드린 J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온몸을 뒤엎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내 위엔 맞이하고 싶지 않은 그림자가 존재했다.
익숙하다. 분명 과거에 느꼈던 기분이다. 난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T가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처럼 보였다.
그의 눈은 날 죽일 듯 붉게 물들어있었다.
T?
어?
감염자가 된건ㄱ...
내 생각이 끊어지며, 그것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끄아아!..." 난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깼다. 하늘을 보니 아직 달빛이 보였다. 새벽이었다. 아직도 귀가 얼얼하다.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평소와는 결이 다른 생생한 꿈. 아직도 내 눈에 잔상이 보이는 듯한 꿈. 난 이게 무얼 뜻하는 건지 확인해야 했다.
꿈을 따라 2층으로 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