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예감
계단에는 달빛이 드리웠다. 마치 평소와 다를 바 없다는 듯, 밝고도 푸른빛만이 이 공간을 메웠다. 평소였다면 이 빛에 안심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빛을 따라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삐걱.. 삐걱.. 이미 들어본 듯한 소리가 울린다. 계속 내려가자, 2층이 눈에 들어왔다. 꿈에서와는 다르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꿈과는 다른 모습의 2층은 계단처럼 달의 푸른빛이 감돌았다. 꿈과는 다르게 안개가 없는, 선명한 2층이었다. 2층에 도달하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T.. 괜찮아..?" J였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선 더 밝은 하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자연스레 난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J는 손전등을 든 채 T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T는 웅크려 몸을 거세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날씨는 비교적 따뜻했다. J 또한 이 사실을 알았는지 몸살인 거냐며 T에게 물었다. 답변은 없었다. 그저 거세게 떠는 T만이 우리 앞에 있을 뿐이다.
난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J는 어느새 내 쪽을 바라보곤 시끄러워서 깬 거냐 물었지만, 그건 내 잠을 방해한 이유는 아니었다. 난 더욱 가까이 다가가 T를 지켜봤다. T는 평소보다 몸집이 커져 있었다. 말랐던 몸엔 근육이 붙은 것 같았고, 어깨도 넓어져 보였다. 하루 만에 운동선수와 같은 몸이 된 듯한 모습인 것이다. 그의 몸에 손을 대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이 너무나 뜨겁게 달궈져 있던 것이다. 마치 안에선 피가 끓는 듯했고,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들만이 툭, 툭,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난 비명을 억눌러가며 급히 손을 뗐지만, 발이 걸려 넘어져 버렸다. 넘어지는 큰 소리가 나자, T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엔 더 이상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생기에 가득 차 있었을 수도 있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붉게 물든 그의 눈은 나를 보더니 천천히 발걸음을 나에게로 옮겼다. 쿵.. 쿵.. 무거운 짐을 끄는듯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온다. 커져가는 걸음 소리에 맞춰 내 심장 소리도 거세진다. 그때, J의 소리가 들렸다.
"T! 그쪽이 아니야! 이쪽을 봐!" 그녀는 날 위해 T를 유인하려 했다. 그녀의 말에 응답하듯, T의 이동 경로는 J를 향한 상태였다. 아까보다 빨라진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던 T를, 난 막아야만 했다. 무엇을 이용할 수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던 와중 식칼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멍해진다. 아직 은빛으로, 또 푸른빛으로 빛나는 식칼이 붉게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잡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난 빛나는 식칼을 집어 T의 등에 상처를 남겼다. 급하게 베어낸 그의 등에선 약간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T의 몸이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으으으...."
"으아아아아아아!!!!!!!!!"
비명일 뿐임에도, 집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이제 내 앞의 존재는 T가 아니었다. 인간이 아니었다.
이제 이건 그저 괴물일 뿐이었다.
그의 주먹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고, 스치기만 해도 살아남을 거란 보장을 할 수 없을 듯 보였다. 이걸 J가 맞는다면 분명..
고민할 틈도 주지 않을 듯이 빠른 주먹들이 날 향해 날아온다. 평소였다면 그냥 맞아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공격들이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익숙함이 느껴진다.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 보이는 느낌. 마치 꿈에서 본 것 같은 느낌.
공격을 피할 수 있을듯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의 공격이 땅을 가격했고, 나무판자가 부서지며 파편이 튀었다. 괴물은 고통스러운 듯 소리 질렀지만, 스스로 판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이때를 노려야 한다.
주변은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미 본 듯 역력했다. 내 눈은 자연스레 부엌의 싱크대로 향했고, 그곳엔 은은히 빛나는 식칼만이 꽂혀있었다. 손전등의 흰 빛, 달의 푸른 빛으로도 빛나는 그 칼은 나를 불렀다. 그렇게, 떨리는 손을 뒤로하고 칼을 집었다. 내 손에 들린 칼은 더 이상 푸르게 보이지 않았다.
내 손의 푸른 선홍빛의 칼날은 강하게 괴물의 등을 찔렀다.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센 핏줄기가 솟구쳤다. 내 몸을 감싸는 건 더 이상 새벽의 찬 공기가 아니었다. 끈적하고 뜨거운 액체가 내 몸을 붉게 물들였다. 그것도 잠시, 팔을 뺀 괴물은 분노를 나에게 표출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귀를 찢는듯한 괴성과 함께 주먹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강한 예감은 날 피할 수 있게 이끌었다. 이후 난 두어 번의 공격을 더 피했고, 격노한 그것은 더 이상 날 바라보지 않았다.
괴물은 J를 향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빠르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왜... 어째서 T가..." J는 절망한 듯 보였다. "도망쳐! 도망치라고!" 난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귀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난 그녀를 세게 당겼고, 괴물은 제 속도를 못 이긴 채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
온 집안은 쿰쿰한 먼지로 뒤덮였다. 마치 안개처럼 말이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의 눈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괴물의 붉은 눈은 점점 가까워졌고, 그렇게 괴성과 함께 안개가 거둬졌다. 그것의 주먹은 이미 날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의 손은 날 가격하려 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내 다리가 조금 더 빨랐다.
예감은 날 이끌고 그것의 다리에 깊은 자상을 남겼고, 그것은 내 앞에 무릎 꿇었다.
그 틈을 놓칠 수 없다.
난 빠르게 그것의 등을 향했다. 방금 남긴 상처는 이미 치료되고 있었다. 높은 재생능력을 갖춘, 감염자의 특징이었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이것을 살려둬선 안 된다.
난 치료 중인 상처를 향해 다시 한번 깊게 칼을 꽂아 넣었다. 듣고 싶지 않은 흉측한 소리가 들렸다.
"아아.. 아아아!...
아파아아아아악!!!"
칼을 통해 강한 진동이 느껴진다.
칼을 뽑는다.
그리고, 칼은 머리로 향한다.
...
그것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이지 못했다. 집안을 가득 메운 먼지는 사라지기 시작했고, 철 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자 떨고 있는 J가 보였다. 크게 충격받은 듯 보였다.
"D.. 정말.. T가 죽은거야..?"
그녀의 물음에 난 고민했다. 잠시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난 칼을 내려놓았다. 둔탁한 소리가 울린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건, 더 이상 T가 아니었어요. T가 아닌, 괴물이 죽은 겁니다."
난 강조했다. 그건 더 이상 T가 아니었다.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신경 써줄 필요가 없다.
아침이 밝아왔고, M과 K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들은 너무나 안타까워하며 시신을 묻어주고 장례를 치뤄주자 말했다.
그렇게 모두가 T의 장례를 치뤄주었다. 집의 뒷마당에 묻어진 괴물의 무덤 위엔 "T"라고 쓰여져있는 넓은 석판이 올려지게 되었다. 난 머릿속을 정리한다는 이유로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들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꽤나 긴 추모가 이어진다. 모두가 T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남겼고, 무덤 위엔 하얀 꽃이 올라가게 되었다.
T에 대해선 안타까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죽인 건 T가 아니다.
마음속이 공허하다. 가슴 한편이 텅 빈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이 슬픔인지 안도감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기나긴 추모가 끝나고, 난 3층으로 돌아왔다. 식칼을 씻기 위해 집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엔 내 모습이 비친다.
선홍빛 칼날이 반짝일 뿐이었다.
칼을 씻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그저 손이 조금 더러워졌을 뿐이라고.
방으로 돌아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은 조용한 거리다.
내일도 모레도, 평범한 하루가 될 것이다.
우린..
다시금 안전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