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기시

by Eian Lim

8. 기시




몽롱한 정신 속에서 안개가 날 덮어온다. 또 한 번의 예지가, 나의 불안감을 증명하러 온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빠르게 정신을 차린 난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하려 했다. 안개가 점점 거둬지며, 이번에도 3층에서 출발했다.

내 방엔 푸르지 않은, 흰빛이 비추고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어색함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깥을 보니 창문이 부서져 있었다. 부서져 떨어져 버린 창문은 파편이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고, 유리 파편들에선 너무나 아름다운 빛들이 반사되고 있었다. 치우지 않는다면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아름다움들을 처분한 후 문고리를 잡았다. 무언가 손에 들려있는 기분이다.

방에서 나온 난 익숙한 듯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엔 거울이 걸려있다. 거울엔 이번에도 내가 서있었다.

손의 묵직함의 근원은 쇠 파이프였다. 쇠 파이프는 녹슬지 않은 짙은 붉은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 얼굴은 피로 가득했다.

이번엔 두렵지 않다. 떨리지 않는다. 내 발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화장실을 나와 계단으로 향했고, 발걸음이 멈춘 곳은 부엌이었다. 이전엔 이곳에서 깨어났었다. 하지만 이번의 꿈은 너무나 조용한 하얀빛만이 부엌을 비출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본다. 식탁, 부엌, 무언가가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생긴 또 다른 의문은 새로운 장소로 날 향하게 만들었다.

T의 방. T의 방의 문고리는 반쯤 부서져 있었고, 문엔 발자국이 가득했다. 분명 아무도 건들지 않았을 방인데, 어째서 이리 되었나 의문이 들었다. 문고리를 잡았지만 돌아가지 않았고, 난 문고리를 힘없이 놓았다. 이후 난 T의 옆방으로 가본다. 그 문 앞에 서자 안개가 다시 몰려오기 시작한다. 난 문고리를 잡았고, 서서히 문고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개가 쏟아져 나온다. 결국 안개는 날 덮었고, 잠에서 깨어났다. 이전과는 달리 심장이 뛰지 않았다. 그렇게, 난 하얀빛의 아침을 맞았다.

잠에서 깨자마자 든 생각은 파이프가 어딨는지 모르겠단 생각이었다. 예지에 있었던 내용은 언젠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라고 생각되는데, 정작 그 물건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집에서 한 번도 돌아보지 못한 구역에 있을 거란 생각으로 난 내 방에서 나왔다.

3층에는 창고가 있다. 가장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구역에 가장 많은 물건이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수많은 물건들 중에선 분명 내가 찾는 물건이 있을 것이다. 미닫이 문을 밀자. 먼지로 뒤덮인 창문에선 노란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은 탁한 창고의 공기를 여실히 보여주었고, 그닥 들어가고 싶지 않게끔 만들었다. 그럼에도, 난 꿈에 나온 물건의 위치가 궁금했다.

둘러보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찾는 물건이 있나, D?" K였다. 난 대답을 망설였다. 어느 누가 쇠 파이프를 찾는다고 창고를 드나든다면, 분명 정상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 어제 M과 고친 창문이 다시 망가져서요. 고칠 도구가 있나 둘러보던 중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과장은 있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내 방의 창문은 너덜너덜해졌기에, 고칠 필요성을 느끼던 참이었다. "그래? 그럼, 잠시 도와주겠네."

K와 나는 함께 창고를 뒤졌다. 다양한 물건들이 나왔지만,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법한 물건들이었다. "창고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쓰레기장이군." 그는 중얼거렸다.

창문에서의 노란빛이 흐려져 갈 때쯤, 그는 나지막하게 나에게 말했다. "D, M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나?" "어제 좀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나빠 보이진 않았던 거 같습니다. 무슨 일 있나요?"

"주변을 좀 둘러보도록 해. M은 지금 몸져누워있다고."

생각해보니, 오늘은 다소 늦게 일어난 듯 싶다. 점심도 안 먹은 채 창고에서 해질 때까지 시간을 보냈으니, M이 어떤 상태인지 알 겨를이 없었다.

"아, 그렇군요. 이따 한번 들러보겠습니다."

"...저번에도 그렇고, 어째서 그리 무덤덤한지, 난 잘 모르겠군. 뭐, 너만의 삶의 방식일 수 있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창고에서 빠져나갔다.

이제 이 방엔 나 혼자만이 서 있었다.


드디어 물건을 찾을 수 있다.


마침내, 조금 낡은 파이프를 들고는 먼지 가득한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난 바로 M에게 향했다. 열지 못했던 문의 옆방에서, 난 문을 두드렸다. "M! 들어가도 되나?" 반응이 없었다. 문을 열자 보인 것은 자고 있는 M이었다. 그의 이마는 불같이 뜨거웠고, 몸은 떨리고 있었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지금 친다면 평화가 이어진다. 지금 처리한다면 우린 안전해진다.

...

아직은 명분이 없다. 근거 없는 살해는 살인으로 보일 뿐이니, 아직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난 파이프를 M의 방에 기대어 놓은 후, M의 이불을 덮어준 뒤 방을 나왔다.

J의 상태가 궁금하지만, 배가 고프진 않다. 식욕보다 중요한 게 있다. 난 1층을 생략하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궁금해하며, 난 잠에 들었다.


잠에선 안개가 날 덮쳐왔다. 다소 옅어진 안개였다. 그런 탓인지, 꿈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일은 없었다. 더욱 선명해진 꿈속에서, 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고 싶었다. 내 방의 깨져버린 창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름다운 하얀 달빛이 내 앞을 비춰줄 뿐이었다.

3층의 전경에서 눈에 들어온 건 창고였다. 다시 보니,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창고의 창문도 꽤나 큰 크기를 갖고 있었다. 그곳에선 전과 같은 노란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난 그것을 기억한 채 2층으로 향했다.

M의 방문은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방에선 붉은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난 파이프를 들고 그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T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몸집이 커지고 근육이 붙었던 T와는 다르게 몸이 길어지고 날렵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와, 아니 '그것'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나에게 빠르게 다가오려 했다. 분명 날 공격하려는 것이다. 재빠르게 파이프를 들었다. 그러자 마치 자신은 아프지 않다며 주장하는 어린아이처럼 소리 질렀다.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질 뿐이었다. 소음 탓일까, 다시 안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 잠에서 깼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예지를 실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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