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시절 부모와 갈등을 만들고 부모 속을 썩이던 자식이 부모와 화해를 하고 관계가 개선이 되는 건 자식이 철이 들어 부모를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모습이 안쓰러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아오면서 어느 순간 부모님의 처진 어깨와 구부정한 등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마냥 기세가 등등하여 자녀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으면 불호령을 하실 것 같은 부모님이 어느 순간 기운 없고 초라한 한 노인으로 여겨질 때 그동안 부모님께 가졌던 서운함과 원망이 있었다고 해도 그 순간만큼은 그 생각이 자연스레 뒤로 지나가게 될 것 같다. 그래서인가 자식인 내가 모든 면에서 더 힘이 있어져서 부모님 눈치 보지 않고 내 맘대로 하게 되었다는 게 가끔은 서글퍼지기도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크면서 다른 자매들에 비해 아버지께 회초리를 많이 맞았었다. 말로써 야단을 들었던 기억은 거의 희미해졌는데 물리적인 아픔과 함께 야단을 맞은 기억의 일부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게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기억되는 건 분명 아닌데도 말이다.
내 기억으로 우리 아버지는 내가 이미 성인이 된 대학생일 때에도 회초리를 드셨고, 그때도 매를 맞는 순간은 무서워서 벌벌 떨며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울면서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얼마나 권위가 없는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부모 말을 가볍게 여기며 마음대로 행동하는지 자주 느끼곤 했었다. 그래서인가 예전 부모님께서 만드신 규칙에 자연스레 행동이 규제되며 살았던 그때 그 부모님의 권위가 지금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나의 잘못의 거의 대부분은 늦은 귀가였다.
30여 년 전 우리 집의 통금시간은 저녁 10시였다. 그때는 아버지께서 만드신 그 규정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었고 아버지 말씀이기에 당연히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기에 규칙을 어기에 되는 상황이 되면 그 상황을 만든 내 행동이 후회되고 그래서 화가 났었고 안절부절못했었던 것 같다. 야단을 맞으면서도 매를 안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런저런 변명으로 하소연했을 뿐이었지 아버지가 만든 규정에 대한 부당함이나 이의 제기를 할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었다.
그렇게 그 당시에는 우리 집의 규칙에 대해 주변에 하소연하는 수준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어느 순간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 때가 있었다. 딸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험한 세상에서 세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불안함이었다는 것을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많은 부분에서 노력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부분이 생긴다. 더구나 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이해를 넘어 측은한 마음에서 그냥 수용하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는 것 같다.
여든이 넘은 아버지는 치아가 없으셔서 음식을 잘 못 드시고 자연스레 소식을 하신다. 언제부터인가 걸음이 부자연스러워지시고 힘겨워지시더니 얼마 전 파킨슨 병 진단을 받으셨다. 청력은 이미 많이 손상되어 보청기를 끼셔도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활동이 느려지시고 말씀이 줄어들으시면서 점점 더 외출도, 사람들과의 교류도 삼가신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의 활력이 없으신 모습이 낯설어져서 가끔 뵐 때도 먼저 다가가거나 이야기를 많이 나누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이 드시고 싶은지,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는지 원하는 걸 말씀하시면 해 드릴 수 있는데 마주해서 부모님의 생각이나 마음을 읽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렵다.
부모와 자식이 생을 거치며 부모는 자식이 아기에서 다시 부모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식은 부모의 성인기와 노년기를 보게 되면서 서로의 나약한 모습을 보는 시간과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온전히 부모님을 이해하는 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건 과거나 지금이나 나에게 부모님은 크게 자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항상 나를 먼저 생각하는 자식이었기에 지금도 나는 부모님보다 더 큰 사람은 되지 못하는 가 보다. 그래도 부모님께 마음을 자주 표현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