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가정'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상담이 시작되었다.
아이를 중심으로 가족상담이 진행이 되어야 하는데 아이가 없는 채 부부로만 먼저 상담을 받기로 했다.
상담사 선생님은 아이가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는지를 먼저 이야기를 하셨다. 아이는 끊임없이 시험할 거고 모든 걸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솔직히 듣는 내내 불편했고 반감이 생겼다.
'아직 우리 아이를 잘 모르시잖아요. 우리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에요'
이 속으로의 되뇜은 상담사 선생님을 향한다기보다 나를 향하는 것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인한 자기 암시 같은.
위기가정.
아이의 문제는 언제나 가정의 문제였다.
부모의 갈등이 아이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했을 것이고, 아이는 자기 때문이라는 자책을 했을 것이고, 아이와 갈등이 있을 때마다 아이 개인의 문제인 듯 해결책으로 제시했던 그동안의 상담은 어쩌면 아이의 자존감을 더 낮게 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뭐가 먼저였는지 순서를 따지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두 번의 부부상담을 마치고 상담사 선생님은 내 우울증상에 대한 상담치료가 별도로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렇게 부부상담과 개인상담으로 일주일에 두 번 퇴근 후 상담센터를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좀 버거웠다. 내 이야기를 꺼내 놓아야 하는 건 부담스러울 때가 있었고, 최근 3~4년 여러 번의 상담으로 내 입장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는 게 지치는 일이었다.
상담사 선생님의 이야기가 때로는 식상하다고 느껴지기도 하였다. 다 알고 있는데 단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나의 안일한 생각들이 지루함에서 피곤함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동안 여러 번의 상담이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게 내가 이렇게 늘 머리로만 생각하고 충분히 성찰하며 절실함을 가지고 실천의 노력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싶기도 했다.
상담사 선생님은 나에게 Self가 제대로 기능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Self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 그동안 내가 짜증도 많았고 부정적 감정을 처리할 버퍼가 없어 그대로 주변사람들에게 쉽게 성숙하지 못한 행동들과 감정들을 그대로 표출하며 지냈나 싶기도 했다. 가족도 아닌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형편없었을까 생각하니 되돌리고 싶을 만큼 너무 창피했다.
선생님은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셨다. 내가 답을 못하고 있자 선생님은 다시 물으셨다. 과거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과거의 나는 분명히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예전 학교 다닐 때 교과서 어느 문학작품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는 글귀를 접한 이후 종종 나는 그 문구에 빗대어 "나를 키운 건 8할이 대책 없는 긍정이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정말 그랬다. 언제나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긍정적 생각과 기대를 현실의 결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언제나 먼저 긍정적으로 상상을 하게 되는 건 그냥 자연스러운 나의 본능이었다. 그러한 본성이 나를 늘 밝게 했던 것 같고 나의 자존감을 유지해 주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걸 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울감이 높아지고 자존감은 곤두박질쳐 나의 감정을 완충시켜 줄 버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내 본연의 모습을 잠시 서랍장에 넣어 둔 것이라고 했다. Self가 제 기능을 할 때 그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반복하셨다.
선생님의 나에 대한 확신에 찬 그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불안감과 우울감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지옥의 나락으로 스스로 밀어버리고 있는 나를 잡아줄 수 있고 내가 혼자 일어설 수 없는데 붙잡을 수 있도록 내밀어 주는 손인 것 같았다.
누군가로부터든 어떤 방식으로든 무조건적인 내편과 위로가 절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