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접시를 접착제로 잘 붙였다고 해도 표시가 남는다. 그리고 쉽게 다시 깨질 수 있는 상황이어서 사용하는데 무척 신경이 쓰인다.
지금 우리 가족이 금이 간 접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 혼자만 이 접시를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고 있다. 남편은 이제 사용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아이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며 후회하고 애 타하며 속상해하고 있다.
나의 결혼생활은 참 힘들었다.
남편은 누나가 있는 막내이자 외아들이었고 결혼을 하면서부터 시어머니와 함께 셋이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남편은 결혼 전에 농담 비슷하게 경제적인 책임은 계속 같이하자고 했고 나는 그 말이 내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겠다는 말로 들려서 내심 좋았다. 그리고 시어머니께서 아이들을 봐주실 수 있으니 마음 편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결혼과 동시에 시어머니와 한 집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불평이나 반감이 없었다.
그러나 시어머니에게는 손주들을 돌봐줘야 하는 게 내 생각처럼 당연한 게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내가 당연히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길 거라 생각하셨고 당신은 필요하다면 당신 딸의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하셨다.
언젠가 여자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여자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어머니는 원하지 않은 육아를 하게 되셨고 힘든 내색을 하실 때마다 나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가 태어날 무렵 시어머니의 요청으로 우리는 시누이가 사는 동네로 이사를 했다. 시누이가 아이들을 돌보아 준다고도 했고 또 시어머니께서 딸하고 가깝게 사시면 자주 오가며 이야기도 할 수 있어서 심리적으로 덜 힘드실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사로 나는 하루 3~4시간을 출퇴근 시간으로 보내야 했지만 싫은 내색 한번 못하고 이사 가자는 제안을 수용했다.
결혼생활 내내 이러한 요구와 제안은 계속 반복되었다. 아이를 봐주시기 때문에, 내가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이유에서 시어머니와 남편이 먼저 결정하고 통보하 듯 말하는 제안은 다 받아야만 했다. 모두에게 좋은 방법이고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라는 말에 언제나 나는 쉽게 설득이 되었다.
그런데 본래가 나는 그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거절하지 못하면서 내 안에 불평과 불만이 쌓여 갔고 그런 상황에 대한 화를 나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이유 없는 짜증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막연히 가족들이 내가 힘든 걸 알아주기만을 바랬던 것 같다. 그리고 한 번쯤은 나한테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내 처지에 대한 불만이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면서 항상 남편에게 짜증 섞인 말투가 되었고 남편은 그런 나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남편이 멀어진 만큼 나는 아이들에게 집착하게 되어 아이들의 작은 실수나 남다른 행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불안해하게 되었고 그만큼 또 지나치게 몰아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의 육아방식이 아이를 망치고 있다고 남편은 나를 질타했고 비난했다.
살짝 금이 갔을 뿐이고 완전히 깨진 게 아니라 앞으로 조심스럽게 잘 사용하면 이후 얼마든지 오래 사용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금이 간 접시를 바라보듯이 나에게 등을 돌린 가족들에게 나는 비 온 뒤 땅이 굳어질 수 있다며 '다시 잘해보자'라고 매달리고 있다.
내가 잘못했다고 다 내 잘못이라고, 뭐든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한없이 낮추면서.
어떻게 하는 게 가정을 지키는 건지, 건강한 가족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건지 몰라서 나는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