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그림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는 사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이름을 대는 사람, 예술에는 우열이 없다는 사람, 세계는 무엇이고 최고는 무엇이며 그림은 무엇이냐며 묻는 사람까지(갑자기 식은땀이 난다) 반응은 제각각일 것이다. 구글에 검색해 보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 리자>고,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은 같은 화가의 <구세주>라는 결과가 나왔다. 최고를 직접 선정하긴 어려우니 에둘러 간 셈이다. 그런데 디스토피아 과학소설 <멋진 신세계>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마음속에는 확고한 순위가 있었다. "세계 최고의 그림은 산세폴크로 시청 건물 벽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다." 그림의 제목은 <부활>, 화가의 이름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 산세폴크로에서 1415년에 태어났다. 산세폴크로는 미술사에서 그리 중요한 곳은 아니지만, 1410년대라는 시점은 의미가 있다. 마사초라는 젊은 화가가 유럽 미술의 새로운 시대를 막 열어젖히기 직전이니까. 마사초는 인물에게 조각처럼 확실한 양감을 부여했고, 원근법을 통해 화폭 전반에 공간감을 부여했다. 2차원의 화폭 속에 3차원의 세계를 재현한 것이다.
왼쪽: <그리스도의 세례>, 오른쪽: <채찍질을 당하는 그리스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지향점도 유사했다. 대표작인 <채찍질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배경은 (평면도를 그리거나 3차원적 재구성이 가능한) 실감 나는 공간에 위치해 있다. 인물에게서는 발을 구르면 땅에서 쿵 소리가 날 것 같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기하와 비례에 기반해 그림을 구성한 덕에 화폭 전반에 느껴지는 조화와 안정감도 눈에 띈다. 그의 <그리스도의 세례>는 숫자와 도형의 비밀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키는 작품 길이의 정확히 절반에 해당한다. 비둘기 형상을 한 성령의 날개가 그리는 직선과 그리스도의 오른쪽 발을 이으면 거대한 삼각형이 그려지는데, 그 삼각형의 중앙에는 정확히 그리스도의 손가락 끝이 위치한다. 원근법과 정다면체를 각각 주제로 두 개의 논문을 쓴 사람다운 치밀함이다.
이처럼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당대의 가장 새롭고 혁신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일군 진보는 바로 다음 세대에 의해 빛을 다소 잃을 운명이었다. 15세기 이탈리아는 피에로보다 훨씬 더 익숙한 이름을 여럿 배출했다.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이들과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은 전성기를 누리고, 이후 수백 년간 유럽 미술의 절대적 고전으로 군림한다. 숱한 예술가가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를 방문해 이들의 그림을 베껴 그렸고, 직접 갈 수 없다면 판화를 구매해 자료로 사용했다. 피에로도 초기 르네상스의 주요 화가로 인정받았지만, 쟁쟁한 후배들만큼의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벽이나 나무판에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고향 산세폴크로를 포함해 우르비노, 아레초, 몬테르키 등 이탈리아 중부의 여러 중소도시에서 고요히 나이를 먹어 갔다.
아레초에 위치한 <십자가의 전설> 연작
그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사백여 년이 지난 20세기 초에 갑자기 서구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초기 르네상스 거장들 중에서 단연코 독보적인 수준으로. 20세기에 이르러 회화 예술은 피에로가 살았던 15세기에 비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명암의 강렬한 대조, 색의 극적인 대비, 강한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의 표정과 몸짓 등 감상자의 감정적 반응을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들이 흔히 사용되었다. 또, 영화와 일러스트레이션 잡지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해 대중의 관심을 두고 경쟁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 미술평론가 베렌슨은 이처럼 강한 자극을 경쟁적으로 추구한 반작용이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열량 높고 자극적인 음식에 지친 사람들이 담백하고 슴슴한 맛을 찾듯, ‘표현하지 않고, 찡그리지 않고, 몸짓하지 않는 예술을 갈구’하는 수요가 발생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이들을 위한 대안이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출산의 성모>
피에로의 그림체는 꽤 개성이 강한 편이다. 인물은 대개 얼굴이 둥글고, 눈이 작거나 머리에 뭔가를 쓰고 있을 확률이 높으며, 거의 절대로 웃지 않는다. 모두가 그림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알고,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바람직한 자세를 취한다. 아주 사소한 동작, 예를 들어 관람자들에게 만삭의 성모가 보이도록 양쪽에서 커튼을 걷는 역할도 피에로의 그림이라면 당황스러울 정도의 진지함으로 수행된다. (두 천사가 이루는 완벽한 대칭은 덤이다.) '짜잔' 같은 경박한 단어는 이 화가의 사전에 없었던 게 틀림없다.
절제된 것은 인물 개개인의 감정과 몸동작만이 아니다. 그의 그림에는 색이 있지만, 색을 더욱 유혹적으로 만드는 광택과 윤기는 없다. 실크와 벨벳이 사라지고 면과 리넨만 남은 세계 같달까. 사실, 피에로의 시대에는 아직 유화 물감이 널리 퍼지지 않아서 이 시대 그림에선 유화의 전매특허인 섬세한 촉감 표현을 찾기 힘들다. (대신 템페라 물감과 프레스코 물감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온갖 질감과 촉감이 경쟁하는 현대 사회에는 부재 또한 매력적인 대안이자 전통이 된다.
<십자가의 전설> 연작 중 세부
이제 ‘세계 최고의 그림’, <부활>로 눈을 돌려 본다. 헉슬리는 ‘고대 그리스의 운동선수처럼 완벽하게 발달한’ 이 그림 속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육체와 지성의 힘을 표현’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그림에서 고대인이 추구했던 고전적 이상의 부활을 읽었다. 완전히 틀린 해석은 아니겠다. 르네상스 화가에게 고대는 영원한 모범이었고,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또한 예외는 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이 그림은 근본적으로 종교화에 속한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지만 사흘 만에 살아나 승천한다는 놀라운 기적. 당대의 화가들은 대개 이 장면을 그릴 때 신약성서의 관련 구절을 참고해 시간적 배경을 새벽으로 설정했다. 또, 붕 뜬 그리스도의 몸이나 신비로운 빛 같은 것을 자주 그려 넣었다.
반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에선 아무도 날아갈 생각이 없다. 그림을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석관이 만드는 단순하고 튼튼한 삼각형 구도다. 그리스도는 몸을 꼿꼿이 펴고 서서, 한 발을 관에 올린 채 정면을 바라본다. 관람자가 있는 방향이지만 이쪽을 보는 것 같지는 않다. 한 연구자의 말을 빌자면, 상대에게 힘을 과시하려는 특별한 행동이나 몸짓 없이 오로지 자신의 존재만으로 만물을 압도하는 모습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부활이 이렇게 일어났다고 전개 과정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기보다는, 사건의 본질을 명백히 표현하길 원했다. 고전적 아름다움이건 기독교적 개념이건, 숭고한 어떤 것을 과장되거나 부산함 없이 표현한다. 단정하고 담백한 장중함이 화폭을 채운다.
헉슬리는 자신의 글 <세계 최고의 그림>의 결말부에서 만약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명작이 피렌체에 걸려 있었다면, 예술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보티첼리의 <봄>이 아니라 <십자가의 전설> 연작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피에로 열풍'이 일단 불기 시작하자, 지리적 불리함은 더 이상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답사라는 새로운 관광 루트가 탄생했다. <십자가의 전설>, <출산의 성모>, <부활> 등을 보기 위해 미술사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평범한 여행자들도 아레초, 우르비노, 산세폴크로를 찾았다. 그러나 헉슬리의 글이 출판된 지 약 14년 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평화와 여유가 낳은 반짝이는 윤기가 사라진 자리에 폭력과 고통의 그림자가 기웃대기 시작했다.
전쟁은 예술에게 잔혹하다. 피에로 답사 루트에 포함된 <십자가의 전설> 연작은 19세기에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략했을 때 프랑스 군인들에 의해 훼손된 전적이 있다. 이번에는 <부활>이 위기에 처했다. 이탈리아는 전쟁이 시작될 당시 독일 및 일본과 추축국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무솔리니 정권의 붕괴 이후 연합국 진영으로 돌아섰다. 이후 연합군과 독일군은 이탈리아 각지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어느 날, 영국군의 한 포병대가 산세폴크로 인근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마을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산세폴크로의 오래된 건물들이 손상된다면 벽에 그려진 <부활>도 같이 손상될 것이다. ‘세계 최고의 그림’이. 헉슬리의 에세이를 읽은 적 있었던포병장교 토니 클라크는 망설임 끝에 상부에 보고했다. 적군이 이미 퇴각한 것 같으니 굳이 포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다행히 그의 판단은 옳았고, 산세폴크로는 평온을 되찾았다.
왼쪽: 올더스 헉슬리, 오른쪽: 토니 클라크
모든 미술작품은 감상자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근본적 과제를 안고 있다. 시선을 잡아 끈다, 눈을 뗄 수 없다, 고개를 돌릴 수 없다 등의 표현은 언제나 찬사로 통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감상자에게 거의 아무런 구애의 몸짓도 하지 않는다. 화가 필립 거스턴의 말을 빌자면, 당신 앞에 버티고 서 있을 뿐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사랑은 가끔 그렇게도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부활>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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