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주 반달살기_한경면 고산리를 기억하며

by 조은정

한국인이라면 제주도에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살다보면 가끔 ‘이게 지금 내 인생의 잭팟이 터진게 아닐까’ 라는 강렬한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제주도 반달살기 체험을 제안받았을 때도 그랬다.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하루하루 머리가 아팠고, 밀린 사진정리와 글쓰기로 하루도 쉬지 못하면서 목의 근육이 잔뜩 뭉쳤지만 제대로 풀지도 못한 채 매일 컴퓨터 앞에서 시달리던 날들이 이어지던 그 즈음이었다.

KakaoTalk_20220418_082455435_08.jpg


그리곤 모든 일정을 다 바꾸었다. 보름 간의 기간동안 절대 바꾸기 힘들 거라 믿었던 강의가 2차례 있었는데 공무원들이라 절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으나, 그래도 혹시나 하고 문의를 드렸더니 내 사정을 이해하곤 흔쾌히 날짜 변경을 해주었다. 재직중인 회사에서의 미팅은 화상회의로 대체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이로써 나는 기쁜 마음으로 제주도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가도가도 설레는 제주도. 갈 때마다 늘 다른 빛깔을 내게 선보여주는 제주도! 최소한의 짐으로 살아보려고 기내용 트렁크 한 개와 배낭 하나를 메곤 당당히 그리고 씩씩하게 공항으로 향했다.

KakaoTalk_20220408_184001097_20.jpg


내가 보름간 머문 곳은 서남쪽에 위치한,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 작은 마을이다. 매일 걸어도 사람은 2~3명 마주치는, 오히려 강아지가 더 많이 보이는 그런 동네. 작지만 내게는 위대했던 동네로 지금은 기억한다. 동네를 걸어 다니면서 현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얻으면서 꽤나 평화로웠던 시간들. 늘 바쁘게만 살았는데 이곳에 오니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져서 좋았다. 내가 머문 숙소는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높은 건물에 거실에는 실내 풀장이 있는, 조금은 특별한 숙소 ‘모켄풀빌라 제주’였다. 주로 장기간 체류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아파트처럼 생긴 건물의 각 집 앞에는 쿠팡에서 배달 온 박스들이 가득 쌓여 있고 자전거, 유모차 등이 놓여 있는 곳들이 많이 보이다 보니 그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여느 아파트의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20220412_102616.jpg


내부는 복층의 구조로 이루어졌는데 아래층에는 거실과 주방, 침실은 위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살짝 무섭기도 했다. 공간이 워낙 넓은데 혼자이다 보니 침대방의 불을 켜 놓고 잠이 들곤 했다. 하지만 황홀할 만큼 놀랐던 건 이 곳에서의 일출. 내가 누워 자던 침대에서 보이던 실시간 일출이라니. 그것도 한라산 뷰! 이건 기대치 못한 큰 수확의 느낌이었다. 매일 이 느낌이 너무 좋아 친구들에게 일출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하고, 알람을 일부러 일출 시간에 맞춰 일어난 뒤 풍경을 감상하곤 다시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20220419_053825.jpg
20220416_072157.jpg


낮이면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켜 놓고 일하는 것이 좋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건 그저 밭. 그것도 파릇파릇한 것이 아닌, 아직 뭔가를 심지 않은 야생의(?) 흙 밭. 하지만 그 흙빛이 이상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관광을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나가면 이상하게 자꾸 집 생각이 나면서 들어오고 싶어지기까지 했으니, 이정도면 나름 꽤 잘 적응하며 궁합을 맞춰 나갔던 듯싶다.

20220415_153844.jpg


동네에서 기억나던 명소가 몇 곳 있다. 유명제과에서는 막걸리 넣은 술빵을 제주 보리빵의 형태로 만들어 팔고 계셨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오죽하면 이주간 거의 매일 들러 주인분과 얼굴을 익히며 안부를 전하기까지도! 요이땅삐삐라는 곳은 이 조용한 동네에서 유일하게 화려하던 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마법처럼 색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젊은이 하나 없을 것 같았던(?) 고산리의 청춘들이 밤마다 그 자리에 모여 있었던 것. 모두가 시끌 벅쩍하게 술을 마시며 즐기는데 비정기적으로 라이브 음악 연주까지 진행되어 더욱 기분이 업 되던 곳. 마치 동남아 여행지에서의 바처럼 말이다. 급, 몹시 해외여행이 그리워지던 순간이기도 했다.

20220417_215034.jpg

무명서점이라는 곳은 길을 가다 우연히 간판을 발견하곤 찾아가게 되었다. 작지만 알차고, 단단하게 영글어가는 책방의 느낌이랄까. 조용하고도 정숙한 공간에서 분명 사진촬영을 하면 너무 튀고 소리도 클 것 같아 주인장님께 허락을 받곤 몇 컷 사진을 찍어 오기도 했다. 글쓰기 모임이 있어서 독립출판을 통해 출간도 진행하신다고 한다. 가장 맛있었던 먹거리는 별돈별의 흑돼지구이! 제주도 돼지고기야 언제나 옳은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곳은 분위기까지 갖추었더라. 야자수와 파라솔, 알전구, 정원, 불멍이 있어주니 이건 뭐 완벽한 데이트코스! 낮과 밤, 두 번을 방문했는데 각각의 느낌이 달라 이를 즐기는 재미 또한 좋았다. 낮엔 하와이, 밤이면 발리 느낌 충만한 돼지고기 맛집! 아~ 지금도 아른거리는 야자수와 파라솔의 흑돼지 향연이여! 고사리가 들어간 치킨은 또 어떻고? 숙소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었던 곳. 사실 기대없이 갔다가 허걱하고 놀랐다. 제주의 고사리가 들어간 치킨과의 콜라보라니! 어쩜 이런 깜찍한 생각을 하신 걸까? 다음 날 또 먹으려고 전화했더니 품절이란 말에 어찌나 좌절했던지. 하마터면 서울행 비행기 티켓을 연장해버리곤 치킨 한 번 더 먹기위해 그곳에 남아있을 뻔!

20220418_193955.jpg


당산봉, 수월봉, 차귀도… 모두 이곳에서 가기 좋은, 이름난 관광지들. 소문대로 모두 좋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머물던 숙소에서 거실의 밭 뷰를 즐기며 음악을 듣던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음을 밝힌다. 내 인생의 제주도 잭팟이 언젠가 다시 터진다면, 나는 다른 곳이 아닌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에 꼭 다시 가고 싶다. 그리고 동네 주민들에게 다시 눈인사를 건네며 웃어 보이고 싶다. 내가 다시 돌아왔다고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기대가 없어 더욱 좋았던, 평창 방아다리 약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