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픽션을 읽으며.
길고도 긴 여정이 끝났다. 24시간이라는 부족한 시간에 쫓기며 읽었던 <시티 픽션>을 드디어 완독했다. 7편의 단편 소설과 마주하며 느낀 점은 부담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으로 느껴졌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게 얼마나 좋겠는가. 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초반의 이야기가 가물가물해지거나, 옛날에 읽다 만 책의 내용이 잘 기억 안 나는데, 그러다 보니 나는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책을 완독, 정독하는 버릇이 생겼다. 최근에는 바빠서 이런 점이 좀 힘들었는데, 시티 픽션은 단편 소설집이라 원하는 이야기만 골라 읽으면 돼서 마음이 조금 편안했다.
오늘의 이야기는 <캐빈 방정식>이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과 주인공의 언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주인공의 언니는 저명한 물리학자고 주인공은 그런 언니의 영향을 받아 유물론자이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려운 이야기가 술술 지나가는데, 내가 이공계 출신이라 그런지 굉장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이걸 쓴 작가는 분명 이과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는데, 글을 쓰려고 찾아보니 정말로 과학자 출신이라 조금 놀라긴 했다. (책을 읽어보면 이런 글은 절대로 해당 분야에서 전공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다는 걸 체감할 수 있다)
주인공은 저명한 물리학자인 '유현화'의 동생이다. 유현화는 독일 등을 거쳐 가며 수많은 약 '국소적 시간 거품'에 관련된 일곱 개의 논문을 발표한 젊고 유능한 인재였으나, 어느 날 센터바버라에서 사고에 휘말린 유현화는 '시간지각 지연 증후군'이라는 병에 걸리고 만다. 시간이란 상대적인 개념이고, 제각각 인지하는 시간의 체감이 다른데, 사고 이후 그 시간지각 기능에 문제가 생기고 만 것이다. 유현화의 시간은 남들보다 훨씬 더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한국에서 센터바버라까지 온 주인공(유현화의 동생)은 유능했던 물리학자인 언니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떠올라 현실을 감당하기 힘들다. 한국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고 있던 유현화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남들과 몇 마디 소통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치료에 어려움을 느껴 동생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한국을 떠나 다시 센터바버라로 돌아간다. 혼자 남겨진 동생은 학원에서 강사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언니로부터 온 편지를 받게 된다. 울산의 큰 관람차 정상에 무언가 있다는 내용. 자신의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담긴 내용이었다. 언니가 편지를 쓰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거라는 걸 안 주인공은 존중의 의미로 5번을 걸쳐 관람차를 탔지만, 얻은 수확이라고는 기묘한 괴담뿐이다. 언니에게 직접 와서 확인하라는 답장을 남긴 뒤에 다시 돌아온 언니의 답장은 그 관람차에 '국소적 시간 거품'과 관련된 '주머니 우주', '시간 거품'이 있을 거라는 대답, 그리고 곧 한국으로 그것을 확인하러 가겠다는 말. 둘은 만나 관람차를 타게 된다. 남들보다 느린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유현화는 관람차 정상에서 지구에서 유일하게 '시간 거품'을 느끼는 사람이 된다.
처음에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아까도 말했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특히나 시간지각 지연 증후군이라는 병이 정말 현실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정말로 있는 병명인 줄 알았다. (그러나 검색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라는 소재를 과학적으로 잘 다룬 느낌이 들었다. '시간 거품'이라는 가상의 개념을 통해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내용도 개인적으로 새로운 시선을 접한 것 같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아마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마주했을 때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주인공의 감정적인 서술 또한 허투루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저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소설이 아니라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공계이긴 하지만 나는 과학이나 물리적인 것들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모두가 부담 없이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언니의 내적 시계는 망가졌다. 이제부터 언니의 뇌 속에서 하루 스물네 시간은 한 시간을, 때로는 10분을 끝도 없이 늘려놓은 것처럼 흘러갈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 279p
편지에는 그런 문장이 있었다. 내 계산은 확실해. '계산'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언니는 가끔 헛소리를 하긴 해도 계산만은 절대 틀리는 법이 없었다.
- 291p
고개를 돌려보니 언니는 아주 천천히, 영원에 가까운 속도로 입꼬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중략> 거봐, 내 말이 맞았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 31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