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인생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스물셋, 어리다면 어리다고 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생애 동안 저는 청춘의 과도기를 살아왔습니다. 그 과정이 행복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후회를 한 적은 많았었지만, 저는 지나간 일들을 하염없이 붙잡는 미련 많은 어른이 된 것 같지는 않아, 저 자신을 질타하고 자책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청춘이었지만, 감히 어른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의 속마음을 인제야 토로합니다. 내가 말을 안 해 답답해하던 엄마도,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는 생각했겠지만, 이 글을 보고 '내 자식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보다 먼저 간 불효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가족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기억 속에서만 살 수 있으니까요. 그저 아직도 부모 마음속에서 살아가는 어리고 여린 사랑스러운 자식으로서 영원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제 감정은 그동안 너무 미비했습니다. 현실이 반쪽짜리 꿈만도 같다고 느낄 정도로, 저 자신이 무미건조하고, 무뚝뚝하고 사람들의 감정선과는 많이 멀어져 있다고 자각했을 만큼, 저는 현실이 아니라 비현실을 살아가는 기분입니다. 울고 싶은데 울어지지 않고, 웃고 싶지만 웃어지지 않는, 그런 상황을 여러 차례 겪으며, 나는 단단한 게 아니라 딱딱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 게 무려 제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적이었습니다.
가족이 싫었지만, 가족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제 사랑은 오로지 가족을 향해서 맴돌아 있었습니다. 나보다 7살, 9살 터울의 언니도 너무 귀찮고 싫었습니다. 나한테 희생을 강요하는 엄마가 싫었습니다. 가정을 무너지게 만든 아빠도 싫었습니다. 그렇지만 울지 않았던 제가 울 수 있던 장소는 모순적이게도 가족의 품 안이었어요. 애증도 결국 한바탕 사랑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아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내가 스무 살이 되기 전날, 교복을 입은 나를 데리고 예전에 살던 동네의 노래방에 데리고 왔었지, 아빠가 나의 어깨를 부여잡고 미안하다며, 끌어안고 흐느꼈던 그 날의 밤이 아직도 생각나. 나는 그런 아빠를 따라 울었지. 나는 아빠를 싫어하기는 했지만, 원망하지는 않았어.
우리 가족의 최후는 여전하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 역시 인생은 일장춘몽이다.
오늘, [유서 쓰기] 모임을 주최했습니다. 유서라는 심오한 주제를 가지고, 저 나름대로 제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의 있는 유서는 실제로 제가 모임에 나가 쓴 유서입니다. 가릴 거 없이 솔직하게 쓴 글이므로 다른 분들이 보시기에 많이 무겁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글을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