냅킨에 적어도 계약이 될 수 있다고?
영문 계약서에 대한 글을 시리즈로 쓰면서, 첫 번째로 미국법에서 계약은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살펴볼게요. 꼭 계약서가 없어도 계약, 즉 권리 의무 관계가 발생한 경우가 있어서요. 그렇다 보니 계약이 이뤄진 시점이 생각과 다를 수가 있고, 계약 조건을 달리 이해하게 될 수도 있고, 양방 간에 계약이 있는지 없는지에 이견을 가질 수가 있고 분쟁이 발생하기도 해요. 글의 간결성을 위해 "~ 합니다"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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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약은 제안 (Offer)과 수락 (Acceptance)으로 성립된다
냅킨에 적어도 계약이 될 수 있는 이유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아직 계약서에 서명 안 했잖아요.”
왠지 그 말 한마디면 모든 게 정리되는 것 같지만,
현실에서 계약은 그렇게 늦게 시작되지 않는다.
계약은 서명이 아니라, 제안과 수락이 만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2. 계약의 시작은 의외로 단순하다 계약은
복잡한 법률 개념처럼 보이지만, 구조는 단순하다.
한쪽이 명확한 조건으로 제안하고,
다른 한쪽이 그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계약이 성립한다.
영미법에서는 이를 ‘의사의 합치 (Meeting of Minds)’라고 부른다.
서로 같은 내용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그래, 그렇게 하자”라고 합의했다는 뜻이다.
복잡한 법률 문구나 서명 날인 없이도 계약이 성립한다.
3. 제안이란 구체적인 거래 조건에 대한 제시다. 제안은 아이디어나 가능성 제시가 아니다.
상대방이 “동의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법적 책임이 생길 수 있는 구체적인 거래 제의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은 제안이 될 수 있다.
“제품 A 1,000개를 개당 10달러에,
3월 31일까지 납품하겠습니다.”
조건이 충분히 구체적이고,
상대방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다.
반면 이런 말은 아직 제안이 아니다.
“가격은 그 정도로 생각 중입니다.”
“가능성은 있어요.”
이건 협상의 시작일 뿐이다.
4. 수락은 서명보다 훨씬 쉽게 이뤄진다
많은 사람들이 계약은 서명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락은 훨씬 가볍게, 그리고 빠르게 이뤄진다.
“동의합니다.”
“그 조건으로 진행해 주세요.”
아무 말 없이 물건을 받고 대금을 지급하는 행동
이 모든 것이 수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이메일로만 얘기했을 뿐인데요?”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5. 조건을 바꾸면, 계약은 아직 아니다
이 지점에서 자주 생기는 오해가 있다.
“조건은 좋은데, 가격만 조금 낮추면 될 것 같아요.”
이건 수락이 아니다.
기존 제안을 거절하고 새로운 제안을 한 것,
즉 반대제안 (Counter-Offer)이다.
이 경우에는
다시 상대방이 수락해야만 계약이 성립한다.
6. 정말로 냅킨에 적어도 계약이 된 적이 있다
이제 이 원칙이 왜 중요한지 보여주는 이야기를 해보자.
1950년대 미국.
두 사람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토지 매매 이야기를 나눴다.
한 사람이 말했다.
“정말 살 생각이 있으면, 써보라.”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식당 계산서 뒷면, 마치 냅킨 같은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이 농장을 5만 달러에 매도하기로 합의한다.”
그리고 서명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술김에 한 농담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종이가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조건이 충분히 구체적이었고,
객관적으로 보아 진지한 합의로 보였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즉, 계약은 이미 성립했다.
이 사건이 바로 미국 계약법에서 매우 유명한 판례로 로스쿨 1학년 계약법 수업에 반드시 나오는
Lucy v. Zehmer 사건이다.
Lucy v. Zehmer, 196 Va. 493, 84S.E.2d 516 (Supreme Court of Virginia, 1954)
법원은 이 판결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당사자의 속마음이 아니라,
외부에서 보이는 말과 행동이 계약 성립 여부를 결정한다.
이후
“냅킨에 적어도 계약이 된다”는 말은
계약의 본질을 설명하는 상징처럼 인용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도... :)
7. 이 이야기가 비즈니스에 주는 메시지
계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계약서가 아닐 수도 있다.
냅킨 위의 문장, 제안과 수락으로 이뤄진 이메일 한 줄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을 제안했고,
상대방은 그걸 그대로 받아들였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아직 서명을 하지 않았더라도
계약은 이미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추가 심화 포인트!
이런 이유로 계약서 작성 시 완전 합의 (Entire Agreement) 조항을 넣는다.
계약서에 기재된 내용만이 계약 당사자 사이의 모든 (완전한) 합의이며,
계약 체결 전에 나눴던 말, 이메일, 메신저, 제안서, 설명 등은
계약 내용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명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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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계약서에 대한 글을 쓰면서 계약이 어떻게 성립되는가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다음엔 영문 계약서의 일반적인 구성 요소에 대해 정리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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