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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므 레터 Dec 28. 2023

무뎌지고 있습니까?

풍전등화. 가냘프게 흔들리는 삶에 대하여.

나는 거의 바닥이 난 와인잔에 든 초파리를 보고 있었다. 파리는 다리를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물가로 나아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무심코 잔을 세게 흔들어보았다. 그럴 때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잔인함을 되새긴다. 파리는 죽지 않았다. 계속해서 가녀린 다리를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질 못했다. 아마 표면장력에 갇힌 것 같았다. 물이란 무서운 거구나. 파리는 천천히 익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다시 세차게 잔을 흔들었다. 파리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계속해서 세차게, 더 세차게. 마침내 파리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 새벽에 우리가 잡은 모기가 열댓 마리는 될 것이다. 마치 자신의 것인양 시뻘건 핏자국을 남긴 채 죽어가는 모기들. 어릴 때 나는 소금쟁이가 자라서 모기가 된다는 친오빠의 말만 듣고 물웅덩이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소금쟁이들을 잡아올렸다. 그리고 모기를 퇴치하는 훈연매트 위에 올려두고 그 벌레들을 화형시켰다. 나는 거의 악을 쓰듯 벌레를 잡았고 벌레를 쇠로 된 판 위에 올려놓을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다친 참새를 잡아다 우리에게 주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결말을 기대했는지는 아직도 물어본 적 없다. 우리는 그 새를 죽였다.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다. 오빠는 나와 동생을 지휘해 분무기를 가져오도록 했다. 세 대의 분무기. 분무기의 팁 부분을 조금 돌려서 풀면 분사가 되지 않고 한 줄기가 되어 물이 발사된다. 우리는 그것을 ‘뽕알탄’이라고 불렀다. 참새에게 쉬지 않고 물을 뿌려댔다.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결국 참새는 익사했다.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에는 불법 밀입국자인 남자친구를 도우려 같이 항해를 하다가 보트가 뭍에 다다를 때즘 익사한 남자의 모습이 나온다. 보트는 분명 뭍에 당도했는데 시체가 널려있었다. 오는 길에 물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이리라. 천천히 익사하는 장면을 상상해봤다. 폐에 아주 조금씩, 마침내 끝까지 물이 들어차는 그 과정을.


어느 날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파도에 몸을 맡기면 괜찮을 텐데 파도 끝에 서서 쉴 새 없이 파도를 맞고 있는 기분이라고. 포말이 따갑게 몸을 때린다. 포말이 부서지면서 작은 물방울들이 쉼 없이 내 숨 속으로 들어찬다. 천천히 익사하는 기분. 온몸에 바닷물이 가득차면서 폐가 터질 것 같은 기분. 마침내는 모든 기억을 훑고 지나가는 의식, 사라지는 의식. 나는 천천히 익사되길 기다리는 초파리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초파리는 자신이 익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뿐.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서, 목에 칼을 꽂아넣어서, 농약을 먹어서, 손목을 그은 채 물 속에 몸을 담가서, 셀 수 없이 많은 양의 자낙스를 먹어서, 목을 밧줄에 매달아서, 연기를 피워서, 차가운 물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서, 어질할 정도로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서 죽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가냘픈 목숨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잔인해진다. 유년기의 잔인함을 우리는 오랜시간 잊고 산다. 그것은 언젠가 커져서 우리를 잡아먹기도 한다. 나는 초파리를 죽일 자격이 없다. 초파리를 죽일 악의도 없다. 하지만 초파리가 주변에 날아다니는 것을 견딜 자신도 없다. 인간의 나약함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 우리는 그것을 깊은 물 속으로 푹 밀어넣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수면 위에서 바들거리는 생명은? 목숨은? 잔인함이 스스로를 향할 때를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를 해할 권리가 있다. 단순히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아니, 나약함을 깊숙이 집어넣을 힘이 없을 때 그러하다. 아니, 고통을 뛰어넘을 만한 강인함이 있을 때만 그렇게 한다. 나약함과 강인함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내가 죽인 초파리를 애도하지 않는다. 누구도 나의 사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구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줄 모른다. 나는 나의 나약함이 수면 위로 아등바등 올라옴을 느끼며 밖으로 나갔다. 산책을 좀 해야겠다. 기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날이 풀렸지만 물은 찰 것이다. 한강이 근처에 있지만 가지 않았다. 몸이 무겁다. 공기가 차다. 물이 많이 차겠지? 우리, 봄에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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