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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레네 Sep 26. 2024

쌤 저희 납치해주세요

2학기 들어 문제행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 놈들이 있다.

맨날 경찰서 신고되거나 학폭 신고되던 무리들이

징계 없이도, 그저 회복적 생활교육의 절차만으로

정말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중에 특히 한 놈은 기대한 것보다 그 이상, 훨씬 더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제일 심각한 놈이었는데, 요즘 들어 모든 선생님들이 놀라워하며 칭찬하곤 한다.


요놈들이 고맙기도 하고 이 밝은 면을 더 비춰주고 싶었는데, 마침 한 놈이 학생부실에 와서는 왜 요새 납치 안 해주냐고. 자기들 납치해 달란다.

걔네들 사이엔 ‘납치’로 통하는, 나랑 밥 먹는 시간.


“아싸 납치됐다”

“학탈(학교탈출)한다 존나 좋아“


참나, 수시로 지들 맘대로 학탈하면서

저 발언은 좀 어이없음.


마침 꽁돈이 생겨서, 요놈들한테 써야겠다 싶었다.


“12시 반까지 학생부실로 와. 다른 애들한테 비밀로 하고. 말하면 뒤진다”


분명 신신당부 했건만 12시 35분쯤 되자 쿵쾅쿵쾅 뛰어내려오며 세 놈이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아싸 학생부장쌤 공짜 밥!!!!!!!“

(썩을 놈들...ㅋㅋㅋ)


“뭐 먹고 싶냐? 맛있는 거 골라라. 10초 안에 못 고르면 청국장집 간다”

스시, 오마카세 요딴 소리나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양심들이 있었다. 가격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학교에서 많이 멀지 않은 양식당을 얘기했다.


한 놈이 애슐리 가고 싶다고 하자, 다른 두 명이

“야, 그건 에바. 새꺄 선 넘지 마라”

하는 소리가 들려서 속으로 픽 웃었다. 귀여운 놈들. 양심은 있나 보네.


이놈들과 해보고 싶은 공감카드 활동이 있어서 주섬주섬 자료들을 챙겨서 나오긴 했다만, 솔직히 두려움이 컸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나누고 싶은 성경구절도 있어서 몇 개 준비했는데. 일대일도 아닌, 일대다의 상황에서 이놈들이 진지하게 대화에 임해주긴 할까.


그렇게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식당에 도착해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한참 후, 음식이 나와 같이 먹기 시작하려는데 한 놈이 먼저 피자를 집어 들고 입에 넣기 전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뱉는 것이 아닌가(너무 당연한 이 말이, 이놈들에겐 당연하지 않다. 그래서 놀랐다).


“감사합니다”라는 그 한 마디가...

마치 이 아이들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듯했다.

준비한 대로 해보라는 주님의 사인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식사가 끝나고 그릇을 싹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후식도 주는 곳이라 다행히 조금 더 앉아있을 수 있었다.


“자, 내가 초성퀴즈를 낼 거야. 이거 맞히면 문상 5천원이다.”

갑자기 그놈들 눈이 초롱초롱 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 특히 너네 여친 생기면 이거 잘 해야 해. ㄱ ㄱ 뭘까?“

“관계! 관계!”

그러면서 셋 다 웃는다... 하여튼(ㅋㅋ)

“땡!!”


한참을 고민하다, 한 놈이 정답을 맞혔다. 정답은 공감.


“오늘 우린 공감하는 연습을 할 거야. 공감은 어떤 상황에서 상대방이 그때 어떤 느낌이었을지를 생각해 보는 것에서 출발해. 그걸 연습하기 위해 감정 맞히기라는 게임을 할 거야. 간단해. 한 명이 감정카드에서 하나를 뽑고 최근에 그 감정이 들었던 일을 설명하면, 나머지가 듣고 맞히는 거야. 할 수 있겠지? 세 바퀴 정도 돌면서 점수 매겨서 1등한테는 상금 만 원 건다.”


갑자기 세 놈들 눈이 더 빛났다. 나눠준 감정 목록표를 씹어먹을 듯 쳐다보고 있는 장면이 귀엽고 웃겼다.

귀여워서 찍었다. 공부하는 모습 처음 봐서.

“예전에 다리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쉬바) 그때 (쉬바) 한 새끼 빼놓고 아무도 안 오는 거야. 내가 그때 존나 이랬어”

(최대한 사실적 기록을 위해 원본을 살리면서도 온라인 공간이라 순화했다. 욕이 없으면 대화가 되지 않는 놈들이라...)

“짜증나는”

“땡”

외로운

“정답!! 플러스 1점!!“


오... 의외로 진지하게 임한다. 신기하다.

“내가 얼마 전에 (쉬바) 저기 학교 옆 빌라 근처에 담배 안 피고 걍 지나간 건데 (쉬바) 어떤 주민 새끼가 지랄해서 학교에 전화 쳐 해가지고 OO쌤이 나 잡으러 왔잖아. 그러면서 나한테 너 이 새끼 또 담배 폈냐고. (쉬바) 내가 그때 이랬다고.“

억울한

“오!! 정답!! 플러스 1점!”


이렇게 당사자의 경험을 듣고 뽑은 감정카드가 뭔지를 맞히는 간단한 활동이다. 표현은 저렇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아이들이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렇게 공감 활동이 잘 마무리되자, 더 욕심이 생겼다. 준비한 성경구절 3개를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다. 이 아이들과 꼭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들이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4,21)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내어주며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마태복음 5:39-40,44)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이건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인데, 읽고 나서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물었더니 대충 이런 반응들이었다.


“예수님 미친 거 아니에요? 정신 나간 소리 하네.“

“남의 속옷을 왜 가져가 씹새끼가 냄새 존나 나는데”

........ㅋㅋㅋ

난 이런 너희의 솔직함이 좋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만 가지 이유 중에 이런 것도 포함이다. 새끼들아.ㅋㅋ


“그치? 예수님 미친놈이지? 근데 있잖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그 예수님 닮아보려고 하는 짓들인 거야. 특히 마지막 구절처럼,

“이 세상 다른 모든 신들은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고 정신을 수양해서
선해져야, 그제서야 예뻐해.
그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
다른 종교들은 모두 인간이 신을 찾아가지.“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님만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에게 아무런 가능성이 없을 때.
그럼에도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자기 사랑을 증명하셨어. 야, 예수님 멋지지 않냐?

나도 예수님처럼 살려고. 말 잘 듣는 놈들,
공부 잘하는 놈들, 사고 안 치는 놈들 예뻐하는 건 쉽잖냐. 그거 못하는 선생님이 어딨어.

그래서 난 맨날 너네랑 노는 거야. 내가 받은 그 조건없는 사랑을 너네한테 그대로 흘려보내고 싶어서.”


숙연해졌다. 신기했다.

이 시점에서 마지막 퀴즈를 냈다. 내가 왜 너희한테 이렇게 시간을 들이고 돈을 들이는 것 같냐고 물었다.

“사고치지 말라고요.”

“선생님들한테 예의 있게 굴으라고요.”

“학교생활 잘 하라고요.”


“음... 그럴듯 하지만 내가 원하는 정답이 아니야. 정확하게 내 마음을 읽어 봐. 정답은 2개임.”


그때, 한 놈이 정답 1개를 맞혔다.

저희를 사랑해서요.


이유 모를 눈물이 핑 돌았다. 그게 아버지 마음인가. 하나님 아버지도 내가 당신의 사랑을 느끼면 이렇게 기쁘실까.


“정답... 와, 어떻게 맞혔어?”

“그냥...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사줄 이유가 없을 거 같아서요.“


곧이어 다른놈에게서 두 번째 정답이 나왔다.

저희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요.


와우. 정답이 나올 것이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우리 모두는 죄악투성이지만, 그 안에 분명 하나님의 창조의 형상이 깃들어 있음을 나는 분명히 믿는다.


그래서 이런 무모한 시도들도 해 볼 수 있는 거고.

그래서 가끔 오늘처럼 이렇게 선물 같은 시간들도 얻어지는 거고.


“야, 담엔 애슐리 가자”

“진짜요? 아싸!!”


애슐리가 뭐야. 내 마음은 너네랑 빕스를 가도 하나도 안 아까운데. 이런 내 마음을 너넨 언제나 알아줄까. 너네가 빕스 밥값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언제쯤 깨닫게 될까. 너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가치있고 빛나는 사람이라는 걸. 너넨 언제쯤 알게 될까.


조금씩 알아가고 있으니까 이만큼이라도 변화된 것일까. 너네는 애슐리 밥값 따위는 하나도 안 아까운, 존재 자체로 소중한 놈들이라고. 그걸 너네가 알 때까지 이렇게 미친 척하며 쏟아붓는 게 내 일이다 이놈들아.


속으로만 대충 이런 말을 내뱉었던 것 같고, 우린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내 눈빛으로 전달했으니 읽었겠지. 못 읽었으면 어쩔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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