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같았던 아이, 재앙이 된 남편
적지 않은 나이에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다. 지은에게 아이는 단순히 인생의 계획 중 하나가 아니라, 신이 주신 가장 큰 축복이자 기적이었다. 조금 늦은 출발이었기에 혹여나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어쩌나 내심 조바심을 냈던 터였다. 그랬기에 임신 테스트기의 선명한 두 줄을 확인한 날, 지은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설렘과 기쁨에 젖어 들었다.
“민석 씨, 이것 봐! 우리 아기야. 생각보다 빨리 우리한테 와줬어!”
지은은 벅찬 마음을 가득 담아 민석에게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민석의 반응은 지은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초음파 사진을 보는 그의 미간은 찌푸려졌고, 얼굴 전체에는 당혹감과 거부감이 역력했다. 그는 마치 덫에 걸린 짐승처럼 온몸으로 불편함을 표현하며 내뱉었다.
“아... 이제 내 자유로운 시간도 다 끝났네. 노는 건 이제 끝이라는 소리잖아.”
그 한마디에 지은의 설렘은 얼음물에 담긴 듯 차갑게 식어버렸다. 주변 친구들은 민석에게
"애 생기면 넌 이제 죽었다"
"지금 아니면 평생 못 논다"
라며 겁을 주었고, 철없는 민석은 그 말을 삶의 진리처럼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 민석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최대로 놀아둬야 한다'는 기괴한 목표 아래 매일 밤을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텅 빈 침대와 깨진 신뢰
임신 초기, 지은을 찾아온 것은 지독한 입덧이었다. 물은 간신히 마실 수 있었지만,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와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었다. 기운 없이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 지은을 뒤로 하고, 민석은 매일같이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평일에도 같이 일하는데, 저녁엔 좀 나만의 시간을 갖게 해줘."
민석은 지은을 술자리에 데려가려 하지 않았다. 임신부와 함께 있으면 술맛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지은은 입덧과 싸우며 밤마다 텅 빈 침대를 지켰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가 되어서야 들어오는 민석은, 지은이 걱정되어 전화를 해도 "곧 들어간다"는 의미 없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혼 전, 지은의 말을 그토록 잘 따르고 부드럽던 남편은 이제 지은의 고통에 무감각한 남이 되어 있었다.
새벽 3시의 가출, 그리고 찜질방의 바닥
임신 9개월, 몸은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져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새벽 3시가 넘도록 민석은 귀가하지 않았고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그동안 쌓여온 서운함과 비참함이 폭발한 지은은 결국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하지만 그 깊은 밤, 만삭의 몸으로 갈 곳은 없었다. 가족들은 타지에 있었고 친구들에게 이런 비참한 꼴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지은의 발길이 닿은 곳은 동네의 낡은 찜질방이었다. 부른 배를 부여잡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 누워, 이불 한 장 없이 딱딱한 맨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지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집에 돌아온 민석이 수십 통의 전화를 했지만, 지은은 독하게 마음을 먹고 전원을 꺼버렸다. 이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항의였다.
파편이 된 일상
다음 날 오전, 퉁퉁 부은 몸을 이끌고 지은이 돌아온 집은 서늘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결국 돌아올 곳은 여기뿐이라는 사실이 발을 뗄 때마다 그녀를 비참하게 짓눌렀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지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거실 바닥에 흩뿌려진 검은 파편들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박살 난 TV 리모컨. 지은이 연락을 끊고 사라진 밤, 민석은 걱정 대신 통제되지 않는 분노를 집 안의 물건에 쏟아부은 것이었다.
지은은 배를 감싸 안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편은 아내의 안위보다 자신의 화를 우선했다. 거실 여기저기에 튄 플라스틱 조각들은 마치 지은의 산산조각 난 기대 같았다. 깨진 파편 하나를 줍지도 못한 채, 지은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눈물만 흘렸다.
딸이라는 실망, 끝나지 않는 유흥
그로부터 얼마 후,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민석은 내심 아들을 원했다. 함께 대중목욕탕에 가고, 축구를 하며 몸으로 부딪칠 수 있는 '진짜 내 편'을 상상했다. 하지만 세상에 나온 아이는 민석의 눈매를 꼭 닮은 예쁜 딸이었다.
민석의 실망은 태도로 드러났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유가 없을 거라며 그렇게 악착같이 놀아대더니, 정작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그의 삶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싱글인 것처럼 밖을 돌았고, 집은 그에게 그저 술을 깨기 위해 잠시 들르는 숙소에 불과했다. 지은은 갓난아이와 단둘이 성벽 안에 갇힌 채, 고립된 육아의 전쟁터에서 홀로 분투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배려'
어느 날, 부부 동반 계모임으로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육아 고충이 화두로 올랐다. 밤잠을 설쳐 피곤하다는 친구들의 하소연이 이어지던 끝에, 민석이 아주 태연하고 자랑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애는 진짜 효녀야. 새벽에 깨지도 않고 아침까지 쭉 자거든. 덕분에 난 한 번도 안 깨고 통잠 자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은은 들고 있던 컵을 놓칠 뻔했다. 허탈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민석이 말하는 그 평온한 ‘통잠’의 이면에는, 아이가 깨서 울면 서둘러 품에 안고 거실을 서성여야 했던 지은의 수많은 밤이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남편의 잠을 깨울까 봐, 지은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지면 서둘러 젖병을 물리며 온몸으로 소리를 막아냈다. 사실 민석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 많아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어도 좀처럼 깨지 못했지만, 지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 한 번도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지은은 그 모든 시간을 홀로 감내했다. 그런데 민석은 아내의 그 보이지 않는 수고를 ‘아이가 순해서’라고 말하며 사람들 앞에서 무용담처럼 늘어놓고 있었다. 민석이 누린 평온한 밤은 아이가 순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단잠을 지켜주려던 아내의 고독한 배려가 만든 결과였다.
민석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친구들 사이에서 세상 편한 아빠가 된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지은은 웃고 있는 민석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서늘한 절망을 느꼈다. 이 사람은 영원히 내가 홀로 감내하는 이 성벽 안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날 지은은 가슴 깊이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