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어둠 속의 목소리

by 에이로

​1. 극장의 유령
​스크린의 불빛이 지은의 얼굴 위로 명멸했다. 주인공의 감정이 고조되던 결정적인 순간, 등 뒤에서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날아와 지은의 귓가에 꽂혔다.


​"아, 저거 결말 뻔한데."


​아주 짧은 한마디였지만, 지은은 숨을 멈췄다. 잡지사 입사 5년 차. 직업병처럼 굳어진 예민함이 머리카락 끝까지 곤두섰다. 마감 때마다 텍스트 토씨 하나, 사진 픽셀 하나에 목숨 걸어야 하는 그녀에게, 몰입을 방해하는 소음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었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기억 속 깊은 곳에 처박아두었던 이름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강민석?'
​하지만 지은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수 없었다. 대리 직함을 달고 실무를 떠안느라 너덜너덜해진 멘탈을 이끌고 도망쳐 나온 유일한 방공호가 바로 이곳이었다. 여기서마저 '사회적인 자아'를 꺼내 누군가와 아는 체를 하고 싶진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지은은 다음 달 기획안에 쫓기는 사람처럼 상영관을 빠져나와 테헤란로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2. 엇박자의 재회
​며칠 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던 오피스텔 근처 편의점 앞에서 지은은 다시 그 목소리와 마주쳤다.
​맥주 한 캔을 따던 남자의 옆모습은 어린 시절 골목대장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한 손에 빨간펜 자국이 선명한 교정지 뭉치를 든 지은이 멈칫했다.


​"민석아, 혹시 며칠 전에 영화 보러 갔었니?"

​지은의 질문에 민석이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듯 날카로운 눈매가 지은을 향했다.


​"어? 너... 서지은? 야, 진짜 오랜만이다. 너도 거기 있었냐? 친구 커플 사이에 끼어서 억지로 끌려갔었지.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

​민석은 여전했다. 트렌드 최전선에서 매일 전쟁을 치르느라 무채색 전투복 같은 정장을 고수하는 '5년 차 에디터' 지은과 달리, 그는 여전히 서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듯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3. 효율적인 '영화 메이트'의 탄생
​지은의 일상은 불규칙한 파도 같았다. 툭하면 터지는 인쇄 사고와 포토그래퍼의 펑크를 수습하느라 친구들과의 약속은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빈말이 된 지 오래였다. 혼자 심야 영화를 보는 것만이 유일하게 통제 가능한 스케줄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민석이 대수롭지 않게 툭 던졌다.


​"나도 영화는 좋아해. 근데 혼자 보긴 좀 심심하고, 누구 비위 맞추며 시간 조율하긴 귀찮거든. 너랑 나랑 딱이네. 우리 그냥 '영화 메이트'나 할까?"


​조건은 심플했다. 효율성을 숭배하는 5년 차 직장인에게 최적화된 계약이었다.


​하나,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기면 군더더기 없이 번개처럼 모인다.


​둘, 퇴근 후 허기는 길거리 떡볶이나 편의점 김밥으로 빠르게 해결한다.


​셋, 영화가 끝나면 감상평 나눔 같은 감정 노동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각자 집으로 향한다.


​치열한 현실을 사는 여자와 현실 밖을 부유하는 남자. 전혀 섞일 것 같지 않던 두 평행선이 '스크린'이라는 교점에서 만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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