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점)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민석의 얼굴 위로 휴대폰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는 소리 죽여 킥킥대고 있었다. 나에게는 몇 달째, 아니 몇 년째 보여주지 않던 무장 해제된 편안한 웃음이었다.
지은은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그 낯선 웃음에 멈칫했다. 인기척을 느낀 민석이 황급히 휴대폰을 엎었다. 너무 과하지 않게, 하지만 분명히 감추려는 동작이었다.
"...안 자고 뭐 해?"
"어? 어, 그냥 회사 단톡방. 내일 회의 준비 때문에 말이 많네."
민석이 태연하게 둘러댔다. 하지만 지은의 눈은 민석의 손가락 끝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 켜진 액정 화면 상단, 카카오톡 배너가 뜨는 찰나였다.
[최지수 대리: 실장님 ㅋㅋㅋ 이 사진 뭐야? 얼굴 가려도 잘생긴 건 안 가려지네~ ^^]
열 살은 족히 차이 날 어린 부하직원. 그런데도 거침없는 반말.
밤 11시. 업무 연락이라기엔 너무 늦고, 자라고 하기엔 이른 이 애매한 시간에 직장 상사에게 'ㅋㅋㅋ'를 남발하며 외모 칭찬을 섞은 사담을 보내는 여자. 그리고 그걸 받아주며 킬킬대던 남편. 아니, 가만 보니 받아주는 것만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가 먼저 신이 나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회의 준비를 반말로 해?"
지은이 차갑게 묻자, 민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오히려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 요즘 애들은 다 이래. 분위기 좀 맞추느라 그런 거지. 넌 무슨 사람을 그렇게 꽉 막힌 꼰대 취급을 하냐?"
"회사 동료끼리 친한 건 알겠는데, 밤늦게 사적으로 연락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사적은 무슨. 그냥 일 얘기하다가 딴소리 좀 섞인 거야. 단톡방에서 얘기하다가 개인 톡 온 거라고.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다. 민석에게는 늘 별거 아닌 일들이, 지은에게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심장에 박혔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외도라면 차라리 소리를 지르고 뺨이라도 때릴 텐데. 이건 너무나 교묘한 회색지대였다. 화를 내면 의부증 있는 꼰대 취급을 당하고, 참으면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영역.
지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따져 묻고 싶었다. 그 '분위기 맞추는' 다정함의 반만이라도 나에게 보여줄 순 없냐고. 하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삼켰다. 지금 싸움을 시작하면 내일 아침 아이가 느낄 냉랭한 공기는 어떡하나.
'그냥... 마음을 죽이자.'
지은은 힘없이 돌아섰다.
'가정을 지키며, 아이를 온전한 울타리 안에서 키울 수만 있다면... 저런 사소한 무례함쯤이야, 감정의 비참함 없이 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왜 신뢰가 이리도 중요할까.
그것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남아 있으니 실망감도 크고, 마음의 비참함은 더 커져 무너져 내리고...
남편이 다른 여자와 히히덕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하는 꼴을 보면서도, 지은은 내일 아침 아이가 마주할 식탁의 평화를 떠올려야 했다. 경제적인 것이 좀 어려워질지라도 이 관계를 그만하는 것이 나을지 수십 번 고민하지만, 결론은 늘 제자리였다.
그 이후의 삶이 지금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이 문을 나서면 홀가분함 대신, 부모의 이혼이라는 주홍글씨, 아이들이 평생 안고 갈 그 상처가 덮칠지도 모르는, 가보지 않은 길이니까.
"적당히 하고 자. 내일 늦지 말고."
지은은 껍데기뿐인 걱정을 내뱉고 도망치듯 안방으로 숨어들었다. 거실에서는 다시 카톡, 카톡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지은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귀를 틀어막아도, 무너지는 마음의 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