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완벽하게 다른 두 세계
영화메이트로 지낸 지 2년, 지은과 민석은 '격월제 영화 메이트'라는 기묘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만 봐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인격의 성분표 자체가 달랐다.
서지은은 소위 ‘바른 생활의 정석’이었다. 초중고 내내 임원을 놓치지 않았고,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지역 명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반면 강민석은 ‘길 위에서 배운 야생마’였다. 가출과 방황, 이름 모를 사건들에 휘말리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대학입시를 위한 공부 대신 직업학교에서 밀가루 반죽을 치며 호텔 조리학과에 겨우 턱걸이한 인물이었다. 다단계니 도박이니 하는 어둠의 경로를 한 바퀴 돌고서야 제자리를 찾은 그와 지은 사이엔 공통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래서 지은은 안심했다. ‘민석을 남자로 좋아하게 될 확률은 0%’라고 확신했으니까. 덕분에 민석의 차 안은 지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고해성사 소가 되었다. 회사에서의 스트레스, 지질한 전 남친 이야기까지. 민석은 지은의 쏟아지는 말들을 무심하게 듣다가도 툭, 한마디를 던지곤 했다.
"야, 서지은. 넌 너무 생각이 많아서 탈이야. 가끔은 그냥 좀 지질하게 굴어도 돼."
2. 스며드는 온도
지은은 혼자였다. 가족들은 모두 타지로 떠났고, 그녀는 좁은 원룸에서 홀로 이 도시를 버텨내고 있었다. 2년 사이 세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 민석은 한 번도 "도와줄까?"라고 묻지 않았다. 그저 이삿날 아침이면 시끄러운 트럭 소리와 함께 제 친구들을 줄줄이 달고 나타날 뿐이었다.
"내가 시킨 거 아냐. 애들이 심심하다길래 데려온 거야."
어느 날은 출근길 버스를 잘못 타 이름 모를 변두리에 고립된 적이 있었다. 당황해 떨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민석에게 전화가 왔다. 상황을 듣던 민석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거기 가만히 있어. 30분 내로 간다. 또 엄한 데 돌아다녀서 일 키우지 말고."
남에게 신세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던 '깍쟁이 수석 졸업생' 지은의 방어벽이 무너진 건 그때쯤이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법을 잊고 살았던 그녀에게, 민석은 어느덧 유일한 비상구가 되어 있었다.
3. 세 가지 선택지, 하나의 진심
갑작스럽게 닥친 퇴사 결정은 지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녀에겐 세 가지 길이 있었다.
• 가족이 있는 지방으로 가기.
• 자신을 짝사랑하던 오빠가 제안한 필리핀 여행사 취직.
• 그리고, 이곳에 남는 것.
지방과 필리핀. 둘 다 나름 괜찮은 선택지였지만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이곳을 떠나면 민석과 영화를 볼 수 없겠지.' 그 아쉬움이 단순히 친구를 잃는 슬픔 이상이라는 것을 지은은 직감했다.
민석 역시 미묘했다.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연락을 하며 "힘들면 나한테 의지해"라고 툭 던지더니, 지은이 반응하려 하면 "야, 농담이야 농담!"이라며 훌쩍 달아났다. 밀고 당기기인지, 단순한 장난인지 알 수 없는 그 온도 차에 지은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4. 모범생의 승부수
"나, 너네 회사 경리로 좀 써줘."
지은의 폭탄선언에 민석이 펄쩍 뛰었다.
"미쳤냐? 수석 졸업생이 이 구멍가게 같은 데서 경리를 하겠다고?"
하지만 지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릴 최선의 결정을 위한 시간, 그리고 민석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할 시간 말이다.
민석의 반대를 뚫고 지은이 향한 곳은 민석의 아버지, 즉 사장님의 사무실이었다.
화려한 이력서를 훑어본 사장님은 안경 너머로 지은을 쳐다보며 감탄했다.
"아니, 이런 인재가 왜 우리 같은 작은 곳에...? 월급도 얼마 안되는데... 정말 괜찮겠나?"
"네, 사장님. 지금 저에겐 단기간의 일자리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신 성실함만큼은 보장하겠습니다."
결국 민석의 질색팔색하는 표정을 뒤로한 채, 지은은 출근증을 따냈다. 영화관 어둠 속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이, 이제 온기 가득한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