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은 감정의 전염 속도를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했다. 지은과 민석은 매일 아침 공기 중에 섞이는 짙은 커피 향을 공유하고, 낮은 파티션 너머로 짧은 눈인사를 건네며 친구와 연인, 그 모호한 경계선 위를 스릴있게, 달콤하게 걸었다. 함께 숨 쉬는 것만으로도 문득 웃음이 터져 나오던, 찬란한 계절이었다.
하지만 민석은 결코 온순하게 길들여진 남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길들지 않은 야생마 같은 거친 본능과, 때로는 철부지 소년처럼 해맑고 장난기 가득한 면모가 공존했다. 어느 날, 민석은 팔에 하얀 깁스를 두른 채 출근했다. 전날 편의점에서 시비가 붙은 행인과 기어코 근처 놀이터까지 가서 ‘한판’을 벌인 탓이었다. 제어되지 않는 뜨거운 다혈질의 불꽃이 남긴 흔적이었다.
보통의 여자라면 그 폭력성에 겁을 먹거나 그를 문제아로 치부했겠지만, 지은은 달랐다. 그녀는 투박한 깁스 뒤에 숨겨진 그의 날것 그대로의 솔직함을 읽어냈다. 무엇보다 거친 성정을 가진 남자가 유독 제 앞에서만은 발톱을 숨긴 고양이처럼 순하고 천진하게 구는 모습에서 묘한 특별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 지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민석은 그녀의 곁에서만큼은 세상 어디에서도 보여주지 않는 가장 순하고 유한 얼굴이 되어갔다. 그렇게 서로의 온기에 길들여지며, 설렘과 신뢰가 뒤섞인 채 3개월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통보
민석의 아버지는 사무실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었다. 주로 이른 아침 주문을 확인하거나 퇴근 무렵 들러 상황을 체크하는 정도였지만, 노련한 사업가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아들과 지은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농도가 단순한 친구의 그것이 아님을 그는 진즉에 간파하고 있었다.
"지은 양, 잠깐 나 좀 보지."
어느 날 오후, 아버지가 지은을 따로 불렀다. 정막이 감도는 찻집에서 마주 앉은 아버지는 찻잔이 식기도 전에 본론을 꺼냈다.
"우리 민석이, 어떻게 생각하나?"
지은은 당혹감에 뜨거운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선명했지만, 그것이 어떤 '미래'를 의미하는지 정의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지은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것인지, 아버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딱 한 달의 시간을 주겠네. 민석이와 결혼할 의사가 있는지 결정해서 알려주게. 내년에 무조건 민석이를 결혼시킬 생각이야. 만약 자네가 마음이 없다면, 바로 다른 곳과 선을 보게 할 거네. 한 달 뒤에 대답해 주게."
그것은 제안이라기보다 거부할 수 없는 통보에 가까웠다.
한 달간의 저울질
그날부터 지은의 내면은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단순히 설레는 마음 하나로 덮어버리기엔 '결혼'이라는 현실의 무게가 무거웠다. 지은은 한 달 동안 민석이라는 사람을 집요하게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자신이 기댈 수 있고, 동시에 닮아가고 싶은 두 가지 모습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책임감'이었다.
평소엔 장난기 가득한 철부지 같다가도, 업무에 돌입하면 그의 눈빛은 서늘할 정도로 달라졌다. 거칠고 고된 현장 일을 마다하지 않고 땀 흘리는 모습에서 지은은 확신했다. '이 사람이라면, 설령 세상이 무너져도 제 가족만큼은 굶기지 않겠구나.' 가난의 냄새에 진저리치던 지은에게 그것은 세상 그 어떤 로맨틱한 고백보다 절실한 미덕이었다.
두 번째는 '그릇의 크기'였다.
민석은 사람을 좋아했고, 그들을 대하는 마음이 지나칠 정도로 넉넉했다. 한 번은 민석의 등에 칼을 꽂고 배신했던 친구가 다시 찾아온 적이 있었다. 지은 같았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텐데, 민석은 "그놈도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다시 투박한 손을 잡아주었다. 지은에게는 없는, 바다와 같은 광활한 품이었다.
사실 지은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본인조차 외면했던 갈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민석의 아버지가 던진 '결혼'이라는 화두는 지은이 꽁꽁 숨겨두었던 해묵은 상처를 건드렸다. 겉으로는 당당하고 야무진 지은이었지만, 그녀의 등 뒤에는 거대한 절벽이 버티고 있었다. 대학 4학년, 남들처럼 취업 준비에 설레야 할 시기에 그녀의 세계는 무너졌다. 홀로 자식을 키워온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면서 집과 사업체가 순식간에 공중분해 되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지은은 졸업과 동시에 황량한 세상에 홀로 던져졌다.
현재 지은의 전 재산은 보증금 500만 원짜리 낡은 원룸과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뿐이었다. 혼수는커녕 당장 다음 달의 끼니와 공과금을 걱정해야 하는 삶. 지은에게 결혼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타인의 영역이었다. 가난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녔고, 혼자 남겨진 밤마다 밀려오는 미래에 대한 공포는 그녀의 내면 깊숙이 침전되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자신에게는 올 수 없을 거라 믿었던 결혼이라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지은의 모든 처지를 알고 있음에도 민석의 아버지는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 가난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욕망, 누군가의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정착하고 싶다는 간절함. 민석이라는 남자가 주는 안정감은 평생 결핍 속에 살아온 지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결국 기한이 다가왔고, 지은은 현실의 벽 앞에서 아버지에게 "예스"라고 답했다.
고요한 약속, 흐르는 시간
하지만 지은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응어리져 있었다. 결혼 논의가 오가고 양가 어른들이 분주해지는 동안에도, 정작 당사자인 민석은 지은에게 단 한 마디의 고백도 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도,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다는 미래의 청사진도 없었다. 그는 마치 모든 숙제를 아버지에게 맡겨버린 아이처럼, 아버지의 커다란 등 뒤에 숨어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장난칠 뿐이었다.
'이 사람은 정말 나를 사랑해서 결혼하는 걸까, 아니면 아버지가 깔아준 비단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뿐일까?'
질문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지은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혹여나 질문의 답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일까 두려웠다. 지은은 이 기묘한 상황 속에서도 민석과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찰나의 즐거움에 눈을 감기로 했다.
불안한 의구심은 '안정'이라는 두꺼운 커튼 뒤로 잠시 밀어두었다. 그렇게 반년이라는 시간이,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순식간에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