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에게 간다면(감상의 다양화)

- 일상의 글쓰기

by 리라
나는 이제 이 긴긴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했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했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 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했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 갑니다. 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만하고 나의 노란 슬픔이 더 떠오르지 않게 나는 당신의 보내 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의 폭을 치워 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략) - 백석, 「편지」

고등학교의 국어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 있다면, ‘쓰기’ 교육을 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입 시험인 수능 국어영역은 1994년에 시작된 이래, 객관식 시험을 지금까지 유지해 왔다. 물론 대학별 ‘논술’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있으나, 지극히 소수의 학생이 선택하는 전형이기에 정규 수업 시간을 할애하여 마음껏 교육하기 어려운 여건에 있다.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학교 숙제의 대부분이 ‘쓰기’와 관련된 숙제였다. 그때는 절기, 행사 때마다 반 전체 학생들에게 글짓기를 시켰다. 200자 원고지에 손 글씨로, 정해진 분량에 맞는 작문을 해가야 다음날 무사할 수가 있었다. 체벌이 자유롭던 시절이라, 남학생들은 몇 대 맞고 끝내지 뭐. 하고 가볍게 넘기는 때도 있었지만, 여학생들은 대부분 꾸역꾸역 글을 만들어 갔다. 일상이 글짓기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일상이 짝사랑이고, 그것의 결론은 매번 연애편지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삼삼오오 모이면 누가 누굴 좋아하고, 누가 누구에게 고백했으며, 누가 누구랑 사귀는지를 시시콜콜 은밀히 떠들었다. 짐작하다시피, 그땐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다. 그러니 작문 실력이 나날이 발전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결국 ‘자아’인 ‘나’를 잘 표현해야 ‘세계’인 ‘너’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야기에 탐닉하던 내게, 실제 상황을 ‘이야기화’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두근거리는 일이었던지 모른다. 정말 없던 대상도 만들어서 ‘연애 사건화’하고 싶던 시절이었다. 즐거운 상상이 내 손에서 구체화 되고 창조된다면. 마치 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입장에 선 것 같은 쾌감이 있었다. 그걸 시도해 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바로 편지이다. 편지에 나의 사연을 적어 보는 것이다. 수신자가 타인이 아니어도 된다. 나처럼 ‘아리수’라는 ‘자아’를 만들어 불러봐도 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 이름이 평범해서 싫었다. 당시 유행하는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명’을 만들고 싶었다. 대학 시절 친구들에게 앞으로 필명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했더니 ‘지현’이라는 이름이 너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해서, 울적했다. 평범한 이름을 갖고 싶지 않은데, 친구들은 날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친구들이 안 불러준다면, 내가 불러주면 된다.


“야, 한 마디라도 해봐. 넌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지우는 갑자기 제삼자를 부른다. 잠자코 라면이나 먹고 있었던 휴를. 모두 조용히 휴만 본다. 지우의 날카로움에 대한, 휴의 반응을 염려하는 것일까. 동정하는 표정들이다.

“휴, 왜들 그러니.”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한새가 나섰다.

“이러면 안 되잖니. 휴, 휴가 어떻게 숨이나 쉴 수 있겠니?”

한새의 넉살에도 불구하고, 휴의 진지한 표정 때문에 공기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김휴. 너 소설 읽어왔어?”

지우의 도전적인 질문에 드디어 휴가 입을 열었다.

“읽었어.”

“그럼 얘기를 해봐. 주인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네가 원하는 질문은 그가 사실적이냐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간단명료한 결론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재희의 질문에 대해, 휴는 정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꼭 설명해야 해?”

“응. 네가 우리 동아리에 들어올 거라면.”

지우도 만만치 않다. 그렇게 보면 재희와 지우는 모두 남자, 여자를 떠나서 같은 구석이 있다.

“난 어디에 들어간다는 걸 믿진 않아. 그래도 말할게, 너희들이 원한다면. 난 그의 진심을 믿어. 이를테면 외투 수선을 맡기러 갈 때의 그 안절부절못함, 외투를 사들일 때의 그 절실함, 만들기까지의 과정, 막상 그 외투를 입었을 때의 그의 모습은 오히려 평범하지. 문제는 외투를 잃고 나서야. 경찰초소와 서장과 고관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그의 모습은 정말 멋져. 여기서 멋지다는 건, 그가 살아있어 보인다는 거야. 무엇을 대표하고 그런 건 잘 모르지만, 난 그가 살아 있어 보여. 그게 사실이야.”

그의 말이 맞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말을 하는 그가 갑자기 멋져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홀린다는 건, 언어에 의해서다. 그의 진심을 알고 싶다면 그의 언어를 보라. 그것이 살아 있는지 보라. 팔딱팔딱 뛰고 있는지 보라. 신선하게,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훔칠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하게. - 어둠을 간직한 낮



위에 인용한 소설은 내가 쓴 것인데, 이 소설에는 일단 내가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름이 나온다. ‘김휴’. 그리고 좋아하는 소설이 나온다. 러시아 작가, 고골리의 ‘외투’이다. 이 소설을 좋아했던 이유는 아주 매력적인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인공 이름이 ‘아카키 아카키에비치’이다. 러시아에서는 이 이름이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난 좋았다. 뭔가 앞으로 간절히 뻗어나가고 싶다가도, 못 하는 것 같은 아련함이 느껴졌다.

모든 존재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앞에서 인용한 백석의 ‘편지’는 서두에 ‘당신에게’라는 말은 없지만, 예상 독자가 ‘당신’이라는 특정 대상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작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의 주인공, ‘수선’이라 불리는 ‘처녀’이다. 편지는 어떤 대상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정해진 형식 없이, 백석의 경우처럼 써도 된다. 백석은 자신이 좋아하는 ‘처녀’가 아프고, 그래서 마음이 슬프고, 그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국어 교사로서 ‘쓰기’와 관련된 교육을 하지 못해서, 학생들의 마음에 ‘노란 슬픔’을 생기게 했다.


나의 수선이 시들어 갑니다. 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 백석, 편지

어느 날부터 학생들의 표정이 누렇게 시든 꽃이다. 잘못된 입시 공부에 시달리다 보니, 생기를 잃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심장 박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혹자는 공부도 원리를 알면, 재미있고 성취감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국어 교사로서 대범하게 말하자면, 우리나라 국어 공부는 재미를 느끼기가 상당히 힘들다. 학생이 주체가 되어, 세상을 해석하는 가운데 언어소통 역량을 강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교사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해석해 주는 가운데 기계적 문제 풀이 역량을 반복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어린 시절에 비해 마음이 아픈 학생들이 많이 보인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다 보니, 친구들과 소통하는 데 자신이 없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힘들어한다. 소위 조별 과제, 모둠 활동을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국어영역의 양대 산맥인 ‘읽기’와 ‘쓰기’ 중, 보다 무게 중심이 가야 하는 것은 단연 ‘쓰기’ 활동이다. 쉽게 말하자면 먹는 행위가 듣기, 읽기요, 소화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말하기, 쓰기라 말할 수 있다. 과도하게 읽어(공부하려고) 얻은 것은 많아 배가 부풀어 오르는데, 그것을 발산하지 못하니 고통스러운 것이다. 얼굴이 누렇게 뜬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 학교 현장에서 ‘읽기’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소화불량 환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과 같다.

글을 읽으면 소화한 것에 대해 뱉어야 한다. 거창하게 각 잡고 쓰라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활동을 한다. 소화한 것(A가 무엇이다)에 대해 간단히 메모해(설명해) 본다. 그것이 인위적으로 느껴지면, 편지를 쓴다. 자신만의 ‘회색 노트’를 쓸 수도 있다. 회색 노트(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소설)는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소설이다. 프랑스의 완전히 다른 집안 배경에 사는 두 소년(자크와 다니엘)이 강압적 교육을 받는 학교에서 남몰래 ‘회색 노트’에 주고받은 편지가 책 제목이 된 소설이다. 자크는 명문가 집안의 자제나,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숨 막혀 고통스러워한다. 그에 비해 다니엘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열린 사고를 지닌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에서 성장하나, 자크의 아픔을 알고, 그를 따뜻하게 위로한다. 다니엘은 아버지가 너무 자유분방한 나머지 가정을 등한시하며 산다는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아픔을 견디는 어머니를 알기에, 자크의 아픔에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소위 모든 집은 각각의 ‘뻐꾸기 우는 사연’이 있나 보다.

자크가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 탈출구로 삼았던 ‘회색 노트’. 그것에 대해 편견과 고정관념을 갖고 몰아세우는 어른들에 둘러싸여, 자크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할 수 있을까? 다니엘의 어머니는 학교 교사인 신부님이 노트의 내용을 보라고 들이밀어도 보지 않는다. 아들의 모욕감을 자신의 감정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자크의 아버지는 가출했다가 돌아온(끌려온) 자크에게 더 큰 모욕감을 심어주며, 한층 더 엄격한 소년원에 보내 버리기로 한다. 코너에 몰린 쥐가 된 자크는 급기야 다니엘에게 마지막 편지를 긴급히 보낸다. ‘아듀(Adieu)’라는 작별 편지 말이다.

그것을 모방하여 고등학교 시절 나만의 회색 노트(파일)에 문집을 만들었다. 벌거벗은 임금님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나만의 대나무숲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장 예민하고, 섬세하고 불안한 시기니까. 그것을 감싸주지 않으면 얼굴이 누렇게 뜨게 되니까. 얼굴만 상하는가? 영혼이, 눈빛이 흔들리며 혼탁해진다. 백석은 노란 ‘수선’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병색으로 노랗게 되는 것을 보고, ‘노란 슬픔’이라고 적었다. 그녀의 슬픔이, 그녀의 홀어머니의 슬픔이, 백석의 슬픔이 되고, 그것을 ‘당신’에게 ‘편지’라는 이름으로라도 전해야…. 그는 비로소 살 수 있었다. 견딜 수 있었다. 이것이 국어의 ‘힘’이자 ‘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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