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색의 시작
또 호표(虎豹), 미록(麋鹿), 교룡(蛟龍)은 수택(藪澤)이나 굴혈(窟穴)에 있어야 그 그칠 곳을 알아서 그치는 것인데, 가령 본고장을 떠나서 성시(城市) 가운데에 그친다면 사람들이 재앙으로 여기고 해칠 것은 필연한 일이다. 거사는 세상에 있어서 거만스러워 남과 합하는 일이 적으니, 길들여진 물건이 아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가고 나란히 달려서 명리(名利)를 구하는 데 그치게 된다면, 이는 호표, 미록, 교룡이 성시에 그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은 내가 그 그칠 곳을 구하여 그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으로 여기고 해치는 자가 이를 것이다.” (하략)
거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나의 뜻이다. 내가 능히 그 그칠 곳을 알아서 그치면 초일(初一)이 체(體)에 응하였다고 말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벼슬하는 데 연연하지 않고 물러가서는 구차하게 숨지 않아서, 이것으로 평인이 되면 초이(初二)의 사(辭)에 합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것을 얻어서 마루를 ‘지지’라고 이름하였으니, 과연 나의 행하고 들어앉는 것과 같지 않은가. 대개 지지(止止)라는 것은 능히 그 그칠 곳을 알아서 그치는 것이니, 그 그칠 곳이 아닌 데에 그치면, 그 그침은 그칠 곳에 그친 것이 아니다.
- 이규보, 「지지헌기(止止軒記)」
고전 수필 중 좋아하는 작품의 한 부분을 데리고 왔다. 얼마 전 학교 내신 문제로 출제한 작품이기도 하다. 수필은 문학 갈래 중 글 속의 ‘나’가 작가 자신을 가리킨다. 그러다 보니 ‘나’의 정서, 세상에 대한 태도, 나아가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현 수능 국어영역에서 소위 ‘복합 제시문’으로 부르는 것은 서정 갈래인 ‘시’와 교술 갈래인 ‘수필’이 한 제시문으로 엮이는 경우를 말한다. 왜 다른 갈래인데도 불구하고(복합), 묶어서(제시문) 출제할까? 방금 말한 것처럼 수필도 시처럼 ‘나’의 정서와 태도를 표출한다는 데 있다. 오히려 가상적 화자(시적 화자)를 드러내는 시보다 더 직접적으로 작가인, ‘나’를 드러낸다. 그래서 묶어서 낼 수 있는 문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은 ‘시’와 어떤 점에서 구별될까? 조동일 교수님의 4대 갈래론에 따르면 이 두 개의 갈래는 나머지 서사, 극과 구별되는 A라고 볼 수 있다. ‘자아’와 ‘세계’라는 두 대상이 있다고 하자. 아주 쉽게 ‘자아’는 ‘나(화자, 주인공, 인물 등)’라고, ‘세계’는 나를 둘러싼 ‘주변의 세상’이라고 하자. 서사 갈래의 대표 종류인 소설과 극 갈래의 대표 종류인 희곡의 경우, ‘나’와 ‘세계’와의 갈등을 보여주며 작품이 전개된다. 내가 예전에 드라마 대본을 쓴 적이 있는데, 읽어 본 어떤 선생님이 평을 하시길, “착한 인물들만 나와서 갈등이 잘 드러나지 않아. 이러면 시청자들은 지루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듣자마자 공감이 됐다. 그러면서 자책했다. 작품 속 악마를 상상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에 대해서 말이다. 맞다. 서정 갈래인 시와 교술 갈래인 수필은 자아와 세계와의 갈등이 작품을 끌고 가는 엔진, 목표가 아니다(전혀 안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다). 최종 목표가 다른 데 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의미 부연하면 시와 수필은 ‘자아’와 ‘세계’의, 화합을 도모하는 관계라는 큰 공통점 아래 하나의 제시문으로 묶일 수 있다. 둘 간의 차이점을 보면, 시는 세계보다 자아가 더 큰 존재이다. 그래서 화자의 주관적 정서를 표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창작된다. 그에 반해 수필은 자아보다 세계가 더 큰 존재이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객관적 깨달음을 나타내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창작된다. 흔히 수필을 ‘교훈적’이라고 하는데, 읽는 독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작가의 세상에 대한 깨달음에 독자가 공감할 수 있게 나타내야 한다. 이것을 어렵게 말하면 ‘객관적’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시를 창작하는 건 수필 쓰는 것보다 쉽다. 본인의 감정을 개성적으로 나타내면 된다. 그것이 독자에게 공감을 얻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수필은 공감을 얻어야 한다. 그러니 세상에 대한 안목을 갖춘 이가 잘 쓸 수 있는 문학 갈래다. 이런 형국이다 보니 독자 입장에선 시를 해석하는 게 수필보다 어려울 수 있다. 창작자가 독자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수필은 처음엔 시보다 해석이 쉬워 보이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창작자의 안목이 보이면서, 곱씹을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깊은 이치가 보인다. 결국 복합 제시문은 이로 보나, 저로 보나 해석하기(문제 풀기) 어려운 조합이다.
중요한 것은 2부의 주제이니까 ‘어떻게 살(쓸) 것인가’를 해결하는 데 다시 초점을 맞춰 보자. 평소 학생들에게 잘하는 말이 있다. “내가 지금부터 논하는 것 중에, 가장 이루기 쉬운 것이 공부이다. 즉, 좋은 대학에 가는 것보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10배 어렵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보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100배 어렵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보다,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이 1,000배 어렵다.” 어떻게 동의하는지? 요즘 학생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에이, 가장 어려운 건 안 하면 되죠, 뭐. 아무리 가장 큰 난제를 미리 회피한다고 해도, 또 그다음 단계의 난제 역시 회피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회 속에 사는 한, ‘좋은 사람’은 역시 만나고 싶지 않은가? 꼭 배우자는 아니더라도. 학생들한테 물어보면 상대의 ‘외모’는 절대 포기 못 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고등학생의 안목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고등학교 교사로만 이십 년 넘게 일했다). 잔인하지만, 그렇다면 너희 ‘외모’는 어떠냐고 묻는다. 상대방도 좋은 사람의 기준을 ‘외모’로만 판단할 때, 자신 있느냐는 것이다. 아,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지금은 이렇게 묻지는 않고, 학생들의 대답에 미소만 짓는다.
결국 내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서로서로 좋은 관계를 맺을 수가 있다. 나도 좋은 사람을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위에서 넌지시 말했으니까 옳은 방향으로 구상한다면? 맞다. 좋은 사람은 ‘외적’ 조건이 아니다. 지금부터 진지하게 사색해 보도록 하겠다. 사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 생각한다. 솔직히 딸아이한테 국어 가르칠 시간은 없어도, ‘좋은 사람’의 화제에 대해서는 얼마나 시간을 할애했는지 모른다. 아이가 “결국 내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군.”이라고 깨달을 때까지 말이다.
‘좋은 인성’은 무엇일까? 무슨 종합 선물 세트처럼, 아니면 뷔페 음식처럼 여러 가지 성품을 차릴수록 좋아 보이겠지만, 본질은 더 간단히 축약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도 속이지 않는 것. 나아가 그 진실이 서로를 위할 것이다. 예를 들어 보면, 지나가다가 어떤 사람한테 첫눈에 반했다 하자. ‘어머, 나 사랑에 빠졌나 봐.’하고 나 자신에게 솔직해진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에게 내 마음을 보여준다. 솔직히 좋아하는데, 싫어하는 척을 하는 게 되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상대가 이미 연인이 있다거나, 내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그래서 나의 뜻을 정중히 거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하기에, 다른 사람도 속이지 않아야 하기에 상대를 저주할 차례인가? 틀렸다. 이때 이전보다 고급스러운 단계의 ‘좋은 인성’이 짜잔 나타날 차례이다. ‘서로를 위할’ 방안으로 그의 행복을 빌며 그의 뜻을 받아들인다. 그와 사귀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좋은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니까 아주 크나큰 좋은 마음으로 그의 뜻을 받아들인다. 어떤가? 내가 그의 행복을 위해주니까, 나도 좋은 사람이고, 그도 그의 행복을 위할 테니까 더욱 좋은 사람으로 늙어갈 것이다. 우리 모두 좋은 사람이니까, 이 지구도 더 좋아질 것이다.
복잡하게 얘기했지만, 사람은 결국 진실해야 한다. 속이 비어 있는데, 잘난 척한다거나, 상대를 싫어하는데 좋아하는 척을 한다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 허위 포장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겉과 속이 그저 같으면 된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마음에 안 들면, 그것에 대해 솔직하게 의사 표현하면 된다. 그런데 그 진실함이 어디까지나 ‘서로를 위한 마음’으로 합하며, 정의롭고, 그리하여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는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소수의 지도층보다 다수의 사회 구성원을 위하는 길이다. 정의롭지 않은 집단, 사회를 위해서 개인은 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인도 썩어가게 되니까. 아무리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상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먹는다 해도, 구정물 속에 있다면 그나마 있던 순결한 영혼도 썩어 들기 마련이다. 겉도 악이고, 속도 악이어서 겉과 속이 한결같이 악으로 일치하는데, 이것이 곧 정의라고 잘못 판단하여 자신만을 위한 불의, 부패, 범죄를 당당하게 행하면 온 조직과 사회를 구석구석 병들게 만든다.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 박팽년
공부 시간에 가르친 시조 중 하나를 가지고 왔다. 명백히 까마귀인데 환경적 변화인 ‘눈비’를 맞았다고, 흰 척하는 대상이다. 그것의 흰 척하는 것에 비해 달은 어떤가? 어두운 밤이라는 주변 상황에 굴하지 않고 밝다. 그것이 어떤 정신 때문인가? ‘님(현대어로 임)’ 향한 ‘일편단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전시가인 시조는 화자가 곧 작가를 나타낸다. 현대 시처럼 가상적 화자(시적 화자)를 굳이 설정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시조를 ‘창(노래)’으로 불렀다. 자신의 정서(마음)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우리도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노래가 절로 나올 때가 있다.
다시 한번 이규보의 ‘지지헌기’를 부르겠다. 이전에는 제목의 의미를 드러내는 부분에만 밑줄을 쳤지만 작가의 태도, 가치관을 드러내는 중요한 부분이 어디인지 다시 한번 밑줄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밑줄을 보여드리기 전에 여러분도 이전 페이지로 돌아가서 ‘A(지지헌)’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읽어 보자. 혹 이해가 안 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찬찬히 읽어 보자. 한자 어휘의 파도를 넘어 계속 반복되는 ‘A’의 의미에 집중하자.
아까 보여드린 부분에서 생략된 부분을 더 넣었다. 파란색은 제재인 A이고, 빨간색은 A의 의미를 상세히 드러내는 부분이다. 예상하는 것처럼 ‘거사’는 이규보 자신이다. 그는 ‘지지’, 즉 그칠 곳에 그친 곳(머물러야 하는 곳에 거처하는 것)으로 ‘헌(軒)’, 즉 집을 마련했다. 여러분도 장차 살고 싶은 곳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거처가 되는 집에 대해 다들 관심이 있을 것이다. 현대인이 살고 싶은 곳은 대부분 번화가의 외적으로 화려한 곳이겠지만, 그래서 본인의 재력을 뽐내고 싶겠지만 ‘거사’, 이규보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벼슬 하지 않으며, 숨어 사는 선비’의 이름을 가지고, ‘성시의 가운데’, 지금으로 말하면 도시 한 가운데 살겠다고 말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가 왜 ‘거사’라는 이름대로 깊은 산에 들어가 은거하며 살지 않느냐고 하니, 그건 인간으로서 떳떳하지 않은 행위라고 말한다. ‘그침의 떳떳한 것’이란 ‘벼슬하는 데 연연하지 않고 물러가서는 구차하게 숨지 않’는 것이라 단언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으로서 왜 짐승(호표(虎豹), 미록(麋鹿), 교룡(蛟龍))처럼 굴 같은 깊은 숲속에 있냐는 것이다. 보통의 인간이 사는 평범한 곳에 그치되(살되), 그들과 ‘구하는 것과 그 이익을 다투’지 않고 살면 된다고 한다. 이규보가 말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쓰기’로 보여준 것이다. 그의 말 중,
거사는 세상에 있어서 거만스러워 남과 합하는 일이 적으니,
길들여진 물건이 아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가고 나란히 달려서
명리(名利)를 구하는 데 그치게 된다면….
(남들처럼) 평범한 곳에 거하되,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는 않겠다는 호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것이 거사가 ‘세상에 있어서 거만’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가 세상에 ‘길들여진 물건’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국어의 ‘본좌’라면 남들과 다른 본래의 ‘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나’에 대해 찾아가고, 그것에 대해 써내려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