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 시를 통해 나를 보기

by 리라

이따금 생각나지만, 연락처를 몰라 만나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 이름도 아주 예쁜, ‘아리수’이다. 지금은 서울의 수돗물로 인식해서 웃음이 나올 수도 있지만, 처음 만났던 대학생 시절 때만 해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단짝 친구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책(전공책을 포함해서) 제일 뒷면,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어김없이 자신의 이름을 써 놓곤 했는데 그것이 그렇게 멋져 보였다. A.R.S.

세상이 이렇게 편리하게 좋아져도 마음속 친구와 만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그 친구를 쉽게 만나지 못하는 것은 이네들이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일까?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나도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제 대학 시절 내가 지은 나, 자신의 이름, ‘아리수’ 말이다. 이름에 있는 큰 물줄기, 무엇보다 큰 나의 존재를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청춘에 가졌던 그 질문이 지금은 훨씬 더 거센 물보라가 되어 나를 몰아친다. 나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국어 교사로서 내가 지금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학생들에게 늘 말하듯이 난 완벽하지 않고, 작품의 해석도 부분적이다. 특별히 문학의 갈래별 특성과 작품에 나타난 미적 특성을 인지하게 하는 과정은 늘 복잡하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그럼에도 학습할 작품은 끊임없이 많다. 사실 문학 작품은 지금도 생산 중이다. 갈수록 난해하고, 알수록 조심스러운 탐색. 그런 고민 중에 어느 날 무심히 읽어 본 예전 문학 교과서의 5단원, ‘단원을 열며’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은 왜 문학 작품을 읽는가?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이미 ‘문학Ⅰ’에서 학습하였으므로, 우리는 문학이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며 정서적·미적으로 삶을 고양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학 작품을 읽는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이 단원에서는 이러한 문학의 기능을 현실에서 구체화할 수 있도록 문학 작품의 수용과 생산을 생활화하는 방안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문학 작품의 수용과 생산을 생활화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둘러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단계적으로 적용하면, 먼저 문학 작품을 수용한다. 다음 나의 작품을 생산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생활화한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참으로 놀라운 문학적 해결이다! 여태까지 무수한 작품을 수업 시간에 대해 왔건만, 여전히 나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은 이 순서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에 문학 작품을 수용할 때부터 잘못했는지 알 수 없지만. 용기를 갖고 가르칠 윤동주의 ‘참회록’과 서정주의 ‘자화상’을 응시한다. 다른 뜻은 일단 옆에 던져두고, 마음에 잡히는 시행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하략) - 윤동주, '참회록'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하략) - 서정주, ‘자화상’


짧은 순간에 나를 감전시키는 시의 언어들. 청춘의 같은 때에, 세상을 살아온 같은 감정을 갖고 있으나 화자는, 시는, 그리고 삶은 다르게 흘러간다. 분명 시에는 화자의 고백이 들어 있었으나, 시를 통해 나를 고백한다. 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 시의 고백처럼, 나를 관통해 시를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그 어떤, 360도 회전 놀이공원 열차보다도 아찔하며 눈물이 난다. 눈물 속에 즐겁다. 왜 시를 읽으면 말갛게 세수하는 것 같은지, 맑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게 되는지. 아래 반원은 학생들과 수업한 결과물이다.

이 기분에 동참시키려고 학생들에게도 시를 짓게 한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를 생각하는 시를 지어보라고 하니, 의외의 학생이 나와서 발표하기도 하고, 의외의 부끄러운 고백이 나오기도 한다. ‘열여덟 해’라는 지난 삶을 학생들이 다양한 상징과 비유로 풀어 놓는 동안, 나의 삶에 대해서도 응시한다. 학생들의 시 창작은 또 하나의 작품이 되어 나를 아찔하게 만든다. ‘나’에 대해 고요히 응시한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게 된다.


방식 ① 윤동주의 화자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아래와 같이 줄이자

- ( 나이 )을 < 비유 >같이 살아왔던가.

그 젊은 나이에 왜 ( ).


방식 ② 서정주의 화자

( 나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 상징 >이다.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 ).

(*보조 칠판에 두 가지 방식을 미리 판서하여 학생들이 칸을 채우며 발표하게 했다.)


자신이 잘 살아가고 있는지, 앞으로 과연 잘 살아갈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명확히 느낄 수 있다. 때때로 시를 읽으면서 살아간다면, 시를 지으며 나아간다면 나는 나아질 것이라고. 윤동주의 ‘자화상’에서처럼 시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나도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서 있는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가을……. 그 아름다움에 ‘나’를 두기 위해 시를 읽는다. 오늘도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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