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톺다 국어'의 1부를 닫을 시간이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wind)이다.’ 이것을 나만의 시(詩)로 변용하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wish)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은 그 어떤 생물보다 고귀한 욕망을 꿈꿀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다. 우리의 청사진이 비단 ‘잘 먹고 잘사는’ 물질적 본능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이다. 본질적으로 여러분은 왜 ‘국어’에 관심이 많은가? 왜 ‘국어’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싶은가? 국어는 ‘나라말’로서,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면 능통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의사소통 능력이 사회적 능력의 가장 기본이고, 우리의 사회적 능력이 앞으로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 통용되는, 대입에 필요한 점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일 년 동안 미국에 나가 있을 때, 택배 받으러 이전 세입자가 오든지, 도난당한 자전거 조사 때문에 경찰관이 오든지 간에 긴 대화가 시작될 것 같으면, 첫마디에 당당하게 외쳤다. 난 한국인이야. 그래서 영어는 아주 조금 해. 난 한국에서 한국말을 누구보다 잘하며 살았다. 아, 물론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도, 중국어도, 스페인어도, 잘하면 좋다. 난 사실 한국어를 누구보다 잘 구사하니, 다른 나라 말도 잘 해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럴 때는 하루키 씨가 정말 부럽다. 그러니까 내 말의 요지는 국어를 잘해야 하는 이유도 역시 ‘숲’을 보는 안목에서 시작하자는 것이다. 정말 자잘하게 시험 하나 잘 보자고 국어 공부하는 건, 그리고 국어책을 읽는 건 지극히 ‘본능’ 같다. 남을 이겨 먹고, 우위에 서보자는 그런 마음 말이다. 그런 소심으로는 국어의 대인, ‘본좌’가 될 수 없다. 쉽게 말하면 결국 인생의 가장 큰 적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더 쉽게 말하면, 그런 마음가짐으로 국어 공부를 하면 쉽게 지친다. 두뇌 회전이 되지 않는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헛것을 보게 된다. 그렇게는 당신의 심장을 제대로 뛰게 할 수 없다.
여태까지 말한 것은 ‘읽기’의 기술이 아니다. 국어 교사로서 ‘기술’을 논한 것이 아니다. 알다시피 1부의 주제는 ‘어떻게 볼(읽을) 것인가’이다. 그동안 많은 학생을 학교에서 봐 왔다. 조변석개(朝變夕改)의 교육 현장에서 버티고, 버틴 이유는 오로지 변치 않는 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걸 참 좋아해. 쓰는 것도 무척이나 즐기고. 그에 못지않게 이것에 대해 수업하는 것도 기쁘고.” 말하자면, 나처럼 읽는 걸 좋아했으면 참으로 기쁘겠다는 바람으로 이 책을 썼다. 읽기와 쓰기 능력이 나의 자부심이 되는 순간, 여러분은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전국연합 학력평가(소위 모의고사) 오답 풀이를 해주면서, ‘어떻게 볼(읽을) 것인가’에 대해 늘 말한다. 이 문제지에 대해 절대 무거운 마음을 갖지 말라. 학생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 이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많은 모의고사 기출 문제지를 풀면서, 품었던 마음은 ‘부담’보다는 ‘기대’ 또는 ‘설렘’이다. 와. 우리나라의 국어 교육에 있어 소위 능력자들이 모여서 만든 문제들을 내가 볼 수 있다니. 알토란 같은 문제를 낳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셨을까. 문제 하나, 하나가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시험지가 아닌가!
우리 딸이 어느 날 학교의 같은 반 학생 중에 국어 시험을 못 봐서, 시험지를 갈기갈기 찢는 장면을 목격하며, 자신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고 했다. 왜 마음이 아팠는가. 그 학생이 시험 못 본 게 너무 공감돼서? 그것보다는 왜 그 귀한 것을 찢어 버리는지 이해를 못 해서. 우리 엄마가 시험 문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데. 출제 기간이면 부엌 식탁에 마치 수험생처럼 앉아 있는 저의 모습을 줄곧 봐 왔던 딸의 관점에서 속상해할 만하다. 그런데 딸도 느꼈겠지만 난 힘들지만 힘들지 않다. 어떤 때 보면 즐기는 것 같다. 문제를 만드는 게 소위 공장에서 기성품을 찍어낸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국어 교사로서 정말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노력했다. 내가 소망하는 학생들처럼 반복해 읽었으니, 나의 문제가 창조되는 것이다. 매일의 반복되는 생활 속에 유일한 돌파구가 될 수 있는 ‘창의성’이 발휘된 것이니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만의 능력을 독자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 때, 보람을 느낀다.
‘읽기’가 시작되는 순간, ‘쓰기’도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Read by hand.”이다. 눈으로 읽으며 손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나만의 표시를 하고, 추론의 흔적을 남겨 놓으며, 반원의 공식 같은 분석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수학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수학 문제를 많이 다뤄보라는 충고에 따라 그 학생은 문제집을 선택한다. 열심히 봤다고 자부하면서 주위 사람들한테 그 문제집을 보여준다. 그랬을 때 주변 사람들은 놀라게 된다. 그것이 흔적 하나도 없이 깨끗한 것이다. 여러분이 책을 읽을 때의 모습이 그렇다. 자기가 배운 일종의 방식에 따라 그것을 적용하면서 머리로, 손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본래의 모습을 유지한 채, 책에서 빠져나온다. 진귀한 보물을 발견했는지, 용궁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말이다. 다이빙을 무서워하니, 서핑도 얕은 물에 그저 머무는 것이다. 파도를 만나면 이크, 난 역시 안 되겠어. 하며 포기한다. "책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간곡히 권유한다. 책(글)을 읽을 때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펜을 들자. 이제부터 국어를 스스로 톺아(풀어) 가자. 그리하여 여러분만의, 여러분이 이해한 또 하나의 (공)책을 만들자. 여러분만의 길을, 삶을 만들어 가자. 여러분의 참 시작을 열렬히 응원하며 1부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