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시조 쓰기
하늘
2학년 3반 김휴
구덩이 속은
실로 무균질의 하얀 방이다.
까만 점들을 굽어보고
한숨을 쉰다.
구름
빨아들인다.
회오리바람
소리쳐 봐도 들어주지 않고
부릅떠 봐도 거들떠보지 않는
거대한 구덩이
그 안에 내가
수천만 개의 널 메어 놓았다.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이는
한 개의 사랑도 완성할 수 없나니
네 속살같이 뽀얀 햇살이
결국 모든 이를 땅속으로
꺼지게 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다시 살아나기 힘든
깊은 한
숨.
“참고로, 시 제목은 이미 있었습니다. ‘하늘, 땅’ 중에서 골라 쓰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시로 볼 때, 제목이 어떤 것이었다 하더라도 내용이 달라졌을 것 같진 않습니다.”
“시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샘은 그 학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
- '어둠을 간직한 낮' 중
위에 인용한 소설은 이전에도 소개했던 내가 쓴 소설, ‘어둠을 간직한 낮’의 일부이다. 문맥을 소개하면 ‘김휴’라는 주인공이 문예반에서 자신의 시를 창작한 것을 두고, 교무부장 선생님이 신기해서 사서 선생님에게 소개하는 부분이다. 교무부장 선생님도 국어 교사로서 ‘시’를 감상하고, 학생을 소개받는 사서 선생님도 본인이 작가 지망생이기 때문에 ‘시’를 자기 나름대로 감상하고 있다. “샘이 그 학생을 이해할 수 있다”고 교무부장 선생님이 말한 것은, 사서 선생님의 ‘국어의 심장’을 알아봤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시 쓰기’의 시작을 소개하면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침 등교하며, 교실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시조창이 나왔다. ‘청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구수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교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면, 얼른 책가방을 나무 책상 옆에 걸고, 따라 불러야 했다. “청....산....이….” 시조에 꽂히신 교장 선생님께서 시조 백일장을 여신다고 하시기에, 긴 기간을 두고 시조 창작법을 담임 선생님께 배운 후 운동장에 앉아 과거 시험 보듯, 백일장을 하던 것도 생각난다. 나도 상을 받아, 집에까지 가서 한복을 입고 온 후 구령대 시상대 앞에 섰다. 그때는 정말 쓸데없는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걸 어디에 써먹나. 나이 든 교장 선생님께서 아무리 시조를 좋아하셔도, 우리 같이 어린 초등학생한테까지 시키다니. 마치 노인학교에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교사가 되니, 수능 고전시가 제시문에 시조가 출제된다. 그렇게 지겹게 부르고, 쓰던 시조가 위풍당당하게 교과서에, 문제집에, 모의고사, 수능에 나온다. 시조를 떠올리면, 한 자, 한 자, 어휘를 고심하며 선택했던 것, 정해진 글자 수 때문에 고른 말을 여기저기 배치해 봤던 것 등이 생각난다. 창작자가 되어 봤으니(그것도 초등학교 시절에!), 시조를 감상하는 태도가 더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창작의 고통을 아니까. 쉽게 얘기하면 4음보의 3장(초장, 중장, 종장) 6구 45자 내외의 평시조 안에 아무 말이나 집어넣을 수가 없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들어가는 말이 없다. 텍스트 안의 모든 말은 의미를 내포하고(숨기고) 있다. 정말 짧게 끝나는 시조(평시조, 단시조)는 어떤 문학 장르보다 더 심하다. 아래 인용한 시조는 ‘면양정가’라는 가사로 유명한 조선시대의 학자, 송순의 시조다. 고어가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 밑에 현대어로도 풀이한다.
십 년(十年)을 경영(經營)하여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여 내니 : 초장(첫부분)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淸風) 한 간 맛져 두고 : 중장(가운데 부분)
강산(江山)은 들일 듸 업스니 둘러 두고 보리라 : 종장(마지막 부분)
- 송순
<현대어 풀이>
십 년을 계획하여 세 칸짜리 작은 초가를 지어 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 맑은 바람 한 칸을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곳이 없으니 (병풍처럼) 둘러 두고 보리라.
위 시조에는 10년이라는 세월의 숫자와 ‘삼’ 간이라는 가장 소박한 집의 형태가 초장에 나온다. 이렇게 소박한 집을 계획하는 데 무려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경영’(계획)적으로. 그렇다면 초려삼간은 어디에 위치할까? 앞서 살펴봤던 이규보의 ‘지지헌기’에 나오는 것처럼 ‘성시’에 있을까? 중장에 작가는 세 개의 방에 본인과 달, 맑은 바람과 함께 한다. 거기까지 읽으면 자연을 마치 인간처럼 생각하여 방을 내어주고, 함께 사는 존재로 인식(의인화)하나보다 생각할 수 있다. 작가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것에 대해 명확하게 하는 것이 종장이다. 종장이 글자 수의 제한이 제일 많다. 초장과 중장은 3자 또는 4자가 한 음보를 형성하는데, 종장은 첫 음보가 반드시 3음절로 이루어져야 하며, 다음 음보는 5자(위의 시조는 6자)로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소설의 구성으로 보면 마치 절정과 결말이 종장에 폭포수처럼 확 떨어지는 것이다. 앞의 글자 수에 나타난 규칙에서 변주하는 이 부분에 주제를 심는다. 이미 세 개의 방을 다 차지했으니, ‘강산’은 병풍처럼 둘러보고 살겠다는 다짐이다. 고전시가에서 ‘강산’은 자연을 뜻하는 대유법이다. 즉 자연(강산) 속에서 소박하게(초려삼간) 사나, 자연과 벗하며(한 간씩 집을 공유함) 깨끗하게(달, 맑은 바람처럼), 그리하여 강산이라는 대자연처럼 크게 살고 싶은 뜻을 10년을 계획하여(경영하여) 이루어 냄을 차곡차곡 전개한 것이다. 정말 한 부분도 놓칠 수가 없다. 이렇게 평시조 안에 자신의 정서를 차곡차곡 치밀하게 담기가 너무 힘들고 또한 제한적이라, 연시조, 사설시조로 아니면 가사로 글을 담는 그릇(형식)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됐으리라 본다.
장황하게 시조의 형식을 거론한 것은, 오히려 초등학교 때 시조를 배운 게 쓸 데 있었다고 생각이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나의 뜻을 담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음절의 말이 얼마나 소중한 의미로 표현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방학이 길다 하더라도 공책이 세 권이었다.
“이건 일기가 아니다.” 큰어머니는 무겁게 선언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무자비하게 쭉쭉 찢어 버렸다. 내가 갈갈 쓸리는 느낌이었다. 가장 무서운 톱니가 있다면 인간의 이빨 사이로 나오는 말이다. “너는 왜 그렇게 꼬인 거니?” 그럼 이건 뭔가요? 나는 큰집 식구도 아니고, 당신의 자식도 아니에요. 하지만 버젓이 함께 살고 있죠. 우리 부모님의 집에서. 이건 세상 기준에서 정상적인 건가요? 내 인생이 희한하게 꼬여 버린 건, 말 그대로 내 책임인가요? 아니면 내 운명인가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이듯, 꼬이지 않듯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요?
“형, 나 이 만들기 갖고 가도 돼? 형은 어차피 일기가 없어서 상을 받긴 힘들잖아.”
사촌 동생의 철없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침대 밑에 구덩이가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내가 구덩이가 되든가. 온갖 위험한 정상적인 것들을 꾸역꾸역 처넣을 거대한 구덩이가 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학교에서 문예반 학생들 15명을 불러 모았다. 대부분 인기 동아리에 밀리고 밀려서 문예반까지 온 아이들에게 문예반은 없어졌으니, 논술 반과 도서 반 둘 중 선택하라고 했다. 교무부장은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애들이 우르르 친한 애들끼리 몰려 시끄럽게 굴었다.
“논술반 샘은 누구예요?”
“요번 논술 반은 사회과, 수학과 선생님 두 분이 맡는다. 그리고 도서 반은 여태까지 있었던 기존 반에 편입되는 것이다. 선생님은 알다시피 사서 샘이다.”
“그럼 당연히 논술 반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니다. 사서 샘께 특별히 부탁드렸기 때문에 문예반에서 했던 활동들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논술에 관심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 논술을 안 보고 대학에 들어갈 수도 있고. 서울의 상위대학 중심으로 논술시험을 본다는 것은 알고 있지?”
“저, 논술 반이요.” / “저도요.” “저도 논술 반에 들어갈래요.”
피곤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머리를 박고 구덩이에 처박혀 있어라.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다
- '어둠을 간직한 낮'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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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휴는 집과 학교에서 ‘구덩이’에 대해 생각한다. 앞서 인용한 김휴의 시 앞부분 중,
구덩이 속은
실로 무균질의 하얀 방이다.
까만 점들을 굽어보고
한숨을 쉰다.
이 부분은 집에서 떠올린 김휴의 ‘구덩이’라 할 수 있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구덩이는 어떤가.
소리쳐 봐도 들어주지 않고
부릅떠 봐도 거들떠보지 않는
거대한 구덩이
그 안에 내가
수천만 개의 널 메어 놓았다.
학교에서 떠올린 타인들의 ‘구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같은 낱말인 ‘구덩이’도 시의 전개상에서 어떤 문맥에 활용되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구덩이는 컴컴하고, 그래서 어둡고 기분 나쁜 곳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휴의 입장에선 ‘무균질의 하얀 방’이 될 수 있다. 오히려 구덩이가 하늘에서 온갖 상식으로 떠들어대는 ‘까만 점들’을 굽어보고 있다. 다음에 나오는 거대한 구덩이는 ‘까만 점들’ 즉, ‘수천만 개의 널’ 넣은 곳으로 등장한다. 그들을 매장하고 싶어 한다. ‘온갖 위험한 정상적인 것들을 꾸역꾸역 처넣을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고 싶어 한다. 이런 욕망을 어떻게 나타내는가. 부모님을 한순간의 교통사고로 잃은 휴는 자신의 고뇌와 불안을 ‘시’에 담아 표현한다.
세월이 흘러도
다시 살아나기 힘든
깊은 한
숨.
그래야만 휴는 ‘숨’을 쉴 수 있다. 남들 눈에는 ‘한숨’을 ‘휴’ 내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휴는 깊은 ‘한(하나의)’ ‘숨’을 쉬며 오늘도 연명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가? 오늘도 숨을 잘 쉬고 있는가? 아니면 한숨을 쉬고 있는가. 심장 박동을 위해 지금부터 여러분이 ‘휴’가 되어 여러분만의 ‘구덩이’를 한 글자라도, 한 음보라도 써 보기 바란다. 시는 여러분의 정서를 숨처럼 뱉게 해줄 것이다. 오늘을 시작(詩作)하며, 오늘도 시작(始作)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