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자립

- 의사를 원하세요?

by 리라

“대한민국의 학원은 마치 슈퍼에 전시된 상품들처럼 다채롭다. 종류도, 수준도, 만족도도. 같은 중학교에 다녔던 로에는 어린 시절, 멋진 건물의 무용 전공하는 언니들이 다니는 곳에서 발레를 배웠다. 내가 동사무소에서 배웠던 발레도 좋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건 분명하다. 로에는 자신이 지금까지 유연한 건 발레 학원에서 다리를 잘 찢어났기 때문이라고 잘난 척한다. 분명히 나도 같은 기간에 발레를 배웠건만, 그런 일은 겪지 않았다.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간이 가도 다리가 잘 펴지지 않는 뻣뻣한 나를 지켜봤을 뿐이었다.”


아이가 자신의 부족한 유연함에 대해 애석해하며, 다녔던 동사무소 수업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할 때면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든다. 왜 아이에게 발레를 배우게 했지? 아이가 다니고 싶어 했나? 아니다. 아이는 발레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럼 내 아이에게 발레 재능이 있었나? 아니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배워도 다리가 펴지지 않는 아이였다. 그럼 도대체 왜 나는 동사무소에서 열리는 특기 수업이라도 꾸역꾸역 다니게 했지? 워킹맘으로서 아이를 급하게 데리러 가다가 차 접촉 사고가 난 적도 있다.

그것은 오로지 주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예체능 사교육의 기본 세 가지, 즉 피아노와 미술, 그리고 태권도 이렇게 아이를 유치원 하원 후에 다니게 하면, 여자아이니까 발레도 가르쳐야 한다는 추천이 이어졌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파스텔톤 무용복을 입고 스트레칭을 하며 우아한 태도를 기르는 것에 대해 굳이 반기를 들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동네 학원을 알아보다 전문적인 비싼 학원일수록 부대 비용(발표회와 대회 등)도 많이 든다는 말에 따라 소박하게 동사무소에서 하는 수업에 보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이에게 무엇이 남았는가. 그저 남들 따라 ‘발레 경험’을 한시적으로 한 것이다. 마치 피아노 학원을 어렸을 때 몇 년을 다녀도, 본인의 열정과 실력이 없으면 건반 위에 손가락 올려놓기도 민망해지는 것처럼. 문제는 이러한 부질없는 비주체적 학원 순례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생 옆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유치원 시절부터 영어 학원이 붙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학 학원이 붙고, 중학교 시절부터 국어 학원이 붙고, 고등학교 입학 전에는 과학 학원마저 붙는다. 마치 거북이 등딱지처럼 어린 꼬마 아이가 학원 가방을 자연스럽게 이고 지고 다닌다. 고등학생이 되면 수학 학원을 영역별로 세 가지 종류를 다니는 학생이 있다든가, 한 달에 몇백, 많게는 천 단위까지 쓰는 집이 있다든가 하는 학원 자부심 이야기가 떠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공부 능력도 돈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세련되면서도 깔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왜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공부해야 하는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예체능을 학원에서 배우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학과 공부에 대하여, 어렸을 때부터 나이에 맞지도 않은 그 어려운 걸 미리 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써야 하는가. 그것은 앞서 전달한 ‘기괴적(기계적) 대학 입시’ 때문이다.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맹목적 경쟁 때문에, 남들보다 앞서서 배워야 한다는 강박을 심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규 학교 교육과정이 아닌 곳에서 미리 학습을 시작한 아이들은 사교육 개미지옥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일찍 학원에서 학습력을 전달받을수록 이들 두뇌에는 공부는 혼자 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자리매김한다. 학원은 학교에 비해 돈을 내고 다니는 곳이다. 설마 돈을 따로 내고 다니는 곳이 학교보다 못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싼 수업료의 학원을 다니는 내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업료의 학원을 다니는 내 친구보다 성적이 못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마치 돈이 많은 환경에서 성장한 내가 그것보다 조금이라도 못한 환경에서 성장한 다른 사람보다 당연히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왜곡된 생각과 같다. 대한민국의 엄청난 사교육 시장은 학생들의 머릿속을 온통 ‘돈’으로 지배한다. 돈으로 공부에 필요한 교재를 사는 것을 넘어, 내 머리에 1등급 받는 정답 칩을 기계적으로 이식받고자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막상 “10억을 받을래, 서울대 졸업장을 받을래” 라고 물으면, 1초의 고민도 없이 10억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조차 학원에 돈을 쏟아부으며 소위 SKY를 간다고 해도, 인생의 고속도로가 펼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남들 따라 학원 순례를 하며 극악한 수능에 맞춰가야 할 필요가 뭐가 있냐는 생각을 당연히 해야 한다. 왜 소위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거북이 등을 해가며, 부모의 노후 자금을 털어 가며, 학원 좋은 일을 시키고 있는가. 학원을 다니며 얻는 것은 수강료만큼 두둑한 숙제량이다. 한두 개 다닐 때는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과제가 사채 이자처럼 계속 불어날 때 인간은 당연히 우울과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과제에 시달리며 학원을 다님에도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부모의 지갑을 홀쭉하게 만든 결과가 결국은 아이의 홀쭉해진 자존감으로 이어지고, 자기 무능감과 자괴감으로 이어지며, 가족 불화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집 밖에 나가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이 오를 것이라 여겼던 내 자녀가, 학교에 나가 정신없이 졸고 있었던 것처럼 학원에서도 멍때리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사교육의 배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급부로 학원을 다녔더니 성적이 오르는 학생이 있다고 치자. 그 학생은 기분이 좋을까. 부모는 진정 기쁠까? 요즈음 고등부 학원에서 내신과 모의고사 성적이 높은 학생들에게 간식 쿠폰을 선물하고 있다. 차라리 저번 성적에 비해 점수가 올라서 받는다면 받을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학원은 어차피 장사이기 때문에 극도로 점수가 높은, 최고의 상위권 학생에게만 치킨 등의 쿠폰을 선물한다. 그 아이는 과연 학원의 도움을 받아 소위 극상위권이 된 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까. 학원은 그 학생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학원 게시판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면서 학생은 학원에 계속 종속되며 수강생으로 남는다. 학원은 그 학생에게 “좋은 성적을 이루었으니, 이제 학원을 하산할 때가 되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학습 능력은 혼자 키워야 즐거울 수도 있고, 그 성과에 대해 온전히 기쁠 수 있다. 진로와 진학을 위한 자기 목표를 스스로 설계하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과정도 혼자 만들어 가야 한다. 여기에 부모의 돈도, 학원의 강압도 필요 없다. 이런 것들이 아이에게 마수의 세력처럼 들러붙는 순간, 아이는 중심을 잃게 된다. 아이 자신이 입시를 스스로 뚫고 나갈 저력을 키우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사회에서 바로 서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대한민국 사교육 열풍을 만들었던 단일한 입시 목표에 대해 짚고 나가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의대’, 즉 가장 확실한 고소득 전문직의 진로라고 생각하는 ‘의치한약수’대에 진학하는 목표다.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부모를 모두 ‘의대생 만든 엄마’로 되고 싶게 만든 열풍이다. 획일적인 이 목표에 대해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애당초 우리 아이가 다양한 모습으로 빚어지는 것이 마땅한데, 왜 그 어렵고도 어려운 하나의 진로, 의사의 길로 몰아가는가. 만약 아이가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진지하게 그 진심을 확인해야 하는 진로다. 의사는 소위 ‘사(師)’자 직업이다. 나도 교사의 길을 들어가기 전에 얼마나 내 진심에 대해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내가 설마 돈을 적게 번다는 것 때문에 사범대를 진학하지 않았겠는가. ‘사(師)’가 들어가는 직업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나는 개인적인 특성상, 인간의 독자적인 자유를 간절히 원했지, 나에게 부여되는 집단적 사명을 원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나의 자아를 버리고 학생들에게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직업이다. 자아와 세계 중 세계가 우선시되야 하는 만큼 나의 모든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 그런데 의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일명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는 직업이다. 무겁다. 너무 진지해서 무섭다. 그 길에 들어가려고 결심하는 건 ‘대단한 개인적 각오’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을 부모가 강요할 수 있는가. 일찍이 내가 아는 의사는 미우라 아야꼬의 책, ‘길은 여기에’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의대생 남자 친구 모습이다. 지극히 고귀해서 현실적인 인물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질 정도이다. 표현하자면 종교적인 승화를 통해 재현될 수 있는 인물이다. 의사가 소위 돈을 잘 벌 수 있는 전문직이라 생각하여 아이에게 권유하는 부모가 있다면, 이것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쯤에서 내 정체에 대해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앞서 밝혔듯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책을 통해 배운 것 같은, ‘돼지’ 같은 독자였다. 어린 시절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은, 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책을 책꽂이에서 빼는 시간도 아까워 옆에 쌓아놓고 읽었던 모습이다. 그래도 나는 볼링 같은 운동은 몸으로 직접 익히고 싶어, 대학원 가까운 볼링장에 가서 무작정 고랑에 빠뜨리며 연습했지만, 나의 아이는 내 말을 듣고 씩 웃었다. 그러더니 자신은 초등 시절 책에 나온 볼링의 기본 동작을 보고 흥미를 느껴, 조용히 방 안에서 반복적으로 따라하며 익혔다고 한다. 공부 자립은 이렇게 쌓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