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

- ‘격’을 만들어 가는 법

by 리라

스스로 세상에 대한 의문을 꼬집고 다니기 시작하면 질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거기에서부터 배움의 문은 열린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자발적으로 낯선 세계를 이모저모 구경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내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 그들의 다양한 생각들, 그리고 책을 통해 배우는 여러 다른 세계의 인물들까지. 나는 호기심이 충만한 상태로 눈을 반짝거렸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친구들과 함께 ‘책을 구경한다’는 것을 빌미로 서로의 집을 돌아다닌 것이다. 아마도 초등학생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는 여러 구실 중 하나를 만들어 주신 것 같은데, 그 시절 아무 선입견 없이 친구들 집을 방문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그들과는 특정 책에 대해 같이 읽진 못했고, 그냥 내가 안 읽었던 책들을 친구네서 빌려 읽을 뿐이었지만 책과 사람과 그들의 공간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모든 인간이 다르듯이, 그들의 집은 달랐다. 그들이 갖고 있는 책 목록이 다르듯이, 다행히 모두 호의적이었고, 책꽂이 앞에서 책을 고르는 우리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간식도 주셨다. 그때는 복잡하게 줄 서 있는 학원 스케줄도 없었고,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빌려 간 책을 돌려주기 위해 신속히 읽었고, 그 신용을 바탕으로 친구 관계가 단단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친구를 만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우리 동네, 우리 또래의 엄마들 중 유일하게 일하는 엄마였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을 엄마로 둔 그녀는 우리 동네, 우리 또래에서 가장 똑똑했고 예뻤으며 무엇보다 반듯했다. 내가 보기에 그녀의 결점이란 없었다. 그녀는 같은 반이 된 나와 사귀면서 나의 욕망을 잘 추켜세워 주었다. 내가 글을 잘 쓴다고, 피아노를 잘 친다고. 그녀도 뛰어난 실력이었지만, 우리집에 놀러 온 그녀 앞에서 굳이 어려운 곡을 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음악 시간 풍금 연주자로 나를 추천해주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근처 아파트로 이사간 후에도, 우리 집에 놀러 와 지극히 평범한 우리집(주택)에 대한 장점을 칭찬해주었다. 후에 싸이월드를 통해 우연히 교사가 된 내 사진을 구경하면서도. 난 지금도 6학년 말 그녀의 모습을 잊지 않고 있다. 학년말이니 담임 선생님께서 자유롭게 짝을 정해서 앉으라고 하셨고, 삼총사였던 우린 당혹해할 수밖에 없었다. 2명이 앉으면 1명은 다른 사람이랑 앉아야 하니까. 그 중 한 명이었던 그녀는 흔쾌히 제안했다. “너희 둘이 앉아. 난 다른 애들이랑 앉을게.” 그러더니 숨겨둔 비밀 친구랑 앉는 게 아니라, 우리 반 여자애 모두와 한 달 동안 한 번씩 앉았다. 단 한명도 제외하지 않고 말이다. 평소 친하지 않았던 애들도 학기말에 그녀와 앉는 기회를 가지면서, 서로간에 재미난 이야기를 피워가는 모습을 보고 난 소중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다. 같이 책을 열심히 읽었지만, 그녀는 나와 생활이 달랐다. 그녀는 어린 나이였지만 어린이가 아니었다. 우쭐대며 백화점의 비싼 옷을 자랑하며 입고 온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녀는 책에 나오는 그 어떤 인물보다 고귀했다. 나는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그래서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에 이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조금은 양심적으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더 깊이, 더 넓게 배워야 했다. 그녀는 명실공히 전교 1등의 성적을 놓치지 않는 학생이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똑똑함보다 내면이 더 딴딴한 사람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에게는 퇴근 후 걸걸하고도 쉰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얘기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하는 ‘지적 대화’였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이 마치 그 학교의 고등학생인 것처럼 어머니가 작품 설명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없는 시간 동안 그녀와 같이 있어야 할 연년생 여동생이 존재했다. 어머니든 여동생이든 그들은 ‘책’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지적 대화’의 시발점이다.

주변에 책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는 이가 존재해야 하고, 그와 대화해야 한다. 요사이 읽고 있는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에 보면, 릴라와 레누가 서로의 빛나는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들은 척박한 돌무덤에서 솟아오른 야생화처럼 고난에 대응하며 ‘극복 방안’을 장착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한다. 어린 소녀들이 소위 인형값으로 받은 돈으로 ‘작은 아씨들’을 반복해 읽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릴라의 제안대로 그들은 유명 작가가 되어, 고난과 역경의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그 책을 낱낱이 파헤치며 읽었고, 그 결과 똑똑한 릴라는 ‘푸른 요정’이라는 책을 바로 쓰게 된다. 책의 주인공 레누 역시 후에 릴라가 자신의 흔적을 지우며 증발하자, 그녀와 자신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학교 교육의 근간은 ‘지적 대화’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독서 활동은 학교가 없어도 스스로 집에서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책에 대해 내가 생각한 것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같고, 혹은 다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을 흔히 독서 토의라고 부른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도서반에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주일에 한 번은 같은 책을 읽은 경험을 공유하며 읽은 바를 되새김질하는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 시절엔 수시 전형도 없었고, 당연히 비교과도 없었지만 정말 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순수하게 독서 토의에 열중했다. 그 결과 전에는 관심 없었던 러시아와 프랑스 문학의 중요 작가들을 인지할 수 있었고, 이중 좋아하는 책들도 생기게 되었다.

같은 책을 읽는 이른바 여행지 동료를 만나고, 책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가면서 우리는 학창 시절 조금이나마 성장과 성숙을 이룰 수 있었다. 불의가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나의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책과 그 책을 통한 지적 대화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지금의 AI와의 대화로는 절대 불가능한 경험이었다. AI는 지치지 않는 서비스맨처럼 나를 위해 헌신한다. 은밀한 내 책상, 내 컴퓨터 안에까지 출장 서비스를 온 그는 시간과 돈에 구애받지 않은 채, 그 어떠한 요구도 정중하게 수행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방문하는 친구의 집이 아니다. 내 친구처럼 독창적인, 지나온 삶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본질적으로 그는 인간을 그저 흉내 낸 기계이기에, 인간의 내적 고뇌와 욕망에 공감하지 못한다. 도서반의 내 친구들, 삼총사처럼. 새로 생긴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콘을 하나씩 받아 들고, 소금기 나는 학교 운동장에 앉아 먹을 수 없다. 500원 동전 하나를 갖고 나와 싸울 수도 없다. 멋진 선배를 두고 내색하지 않은 채 속으로 끙끙거리며 경쟁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지금의 학교에서 우리는 ‘에듀테크 활용 수업’보다 오히려 원시 시대처럼 ‘인간 대 인간’간의 만남 더 나아가 원활한 의사소통과 인간 사이의 지적 대화에 몰입해야 한다. 에듀테크는 인간 사이의 지적 대화가 무르익을 때, 필요에 의해 효율적으로 써먹으면 된다. 훨씬 더 고급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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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대화를 마무리하면, 학교에서의 ‘지적 대화’를 통해 인간과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가운데, 지적 성장과 인격의 성숙을 이룬 인간을 선발하는 대학 입시가 필요하다. 지금으로서는 생기부의 비교과를 활용한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이에 가장 가깝다. 서울대가 2028년 입시에서 수시의 비중을 높이고, 기존 수시의 지역균형선발 인원을 학교당 2명에서 3명 늘리고, 이것을 일반고로 제한한 것은 의미가 크다. 서울대는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느슨한 수능 최저(3합 7)마저 과감히 던져버렸다. 그들은 10분 남짓한 시간으로 학생의 ‘격’을 판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 학생이 쌓아온 2년 반이라는 시간, 즉 5학기 동안 해 낸 학교생활이 생기부로 고스란히 놓여 있으니까.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초등학교 시절, 나의 친구는 그 시절에도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지금 시절에도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다. 오로지 학교생활을 통하여. 그녀의 놀라운 ‘지적 대화’를 통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