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의 상속자가 되려면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의 나가사와 대사 중
야심 차게 2학년 학생 중 뛰어난 성적을 가진 학생들을 소수 모아, ‘같은 책’을 학기 말에 읽힌 적이 있었다. 이것은 교사가, 그것도 독서 교육에 심취한 국어 교사가 2학년 부장을 맡아 학생들을 지도할 때 가능한 프로그램이다. 대입을 코 앞에 둔 2학년 학기 말에, 아무리 생기부 기록을 위해서라도 독서에 시간을 쓰는 걸 학생들이 꺼리기 때문이다. 이들을 모아 그것의 필요성을 설득해야 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학생의 저녁 시간을 비워야 하며, 무엇보다 책의 완독을 독려해야 한다.
그동안 학생들은 ‘각자 독서’만 해왔다. 그것이 효율적이고, 보다 개성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생부종합전형(줄여서 학종)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예전처럼 생활기록부에 독서 특기사항 목록이 대학에 전송되지 않는다고 해도, 서울대가 더 이상 ‘내 인생 세 권의 책’을 자기소개서에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모든 심화 탐구의 기반으로서 독서 활동을 제1원칙으로 삼는다. 과목별 세부능력특기사항 등에 단순 독후감이 아닌, 책에 대한 심화 탐구가 있으면 책 제목을 교사가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당초 학종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뛰어난 내신 성적을 받는 학생들이기에, 읽기 활동을 어려워하지 않으며 그것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한다. 다만 예전 학생들에 비해 ‘효율’에 집착한다. 그래서 정독보다는 발췌독을 선호하며, 그마저도 검색 프로그램을 활용하고자 한다. 수업 시간에, 아니면 학교 프로그램 시간에 학생들이 발표하는 이러한 ‘개별 독서’는 철저히 자신만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아무도 그 책에 대해 공유 경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해도 모르므로. 그러니까 대략 말해도 아무도 그 얇음에 대해 지적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대학에서 그간 학생들이 기록했던 독서 특기사항 목록이 너무 형식적이라 전송할 필요가 없다고 선 그었음에도, 학생들은 여전히 '심화 탐구'한 척하며 독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시도하는 이 프로그램을 위해 결의에 찬 마음으로 12월의 어느 겨울, 야심한 시간에 2학년 학습실에 모였다. 서로가 같은 책을 읽었기에, 그리고 학종이라는 같은 목표를 갖고 있기에, 마지막으로 뛰어난 성적의 학생이기에 지금까지의 발표와는 다른 색깔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나와 달리, 학생들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서로 어떻게 발표 자료를 만들어 왔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여태까지 다른 교과목 시간에 발표했던 것처럼, 같은 책을 가지고도, ‘개별 독서’를 신기하게 풀어냈다. 기이하게도 학생들의 발표가 진행될수록 그들은 다른 책을 읽어온 것 같았다. 정말 하나의 대상도, 그 어떤 이야기도 겹치지 않았고, 그렇기에 공유되는 맥락도, 공감의 표정마저도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마치 같은 드라마 미니시리즈에 대해 얘기해야 하는데, 학생들이 시간이 없으니까 총 12부작의 드라마 중, 각자 다른 회를 보고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드라마의 최종회를 보지 않고, 그 드라마에 대해 아는 척한다고 생각하니, 이 성의 없음에 대해, 이 무지에 대해, 이 관성에 대해, 아니 무엇보다 순진했던 나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
이미 편한 길을 경험한 자가, 불편한 길로 굳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혹 진리라고 해도.
이것은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지 않는 시대의 잘못이 크다. ‘본질’을 왜곡해도 적당히 타협하는 가치의 잘못이 크다. 우리 사회는 어느 때부터 ‘척’의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럴싸해 보이는 것에 현혹당한다. 심지어 ‘읽는 행위’에 대해서도 ‘척’에 심취한다. 독서는 소위 명품백 소유가 아니다. 내가 어느 책을 갖고 다닌다고 해서, 그 책의 본질을 아는 자, 상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상속자는 감히 말하건대, 삼독(三讀) 이상을 한, 찐 독자만이 쓸 수 있는 왕관이다. 여기서 삼독(三讀)은 단순 횟수가 아니라, 온전한 이해를 가리킨다, 그런데 학생들은 세 번은커녕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는다. 희한하게도, 완독을 고(高)시간, 저효율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간에 ‘같은 책’ 상속자인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책을 그저 발췌독하여 가볍게 읽고, 자기만의 느낌으로 ‘읽은 척’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나가사와 선배는 명문가의 명문대 학생이었지만 사실 포장만 요란한 쓰레기였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텅 비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간격이 지나치게 컸기에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도 ‘좋은 책’을 알았으며, ‘좋은 사람’을 볼 줄 알았다. 주인공인 와타나베에게 잘난 척하며, ‘위대한 개츠비’니, ‘세 번’ 읽는 인간이니, 하며 떠들지만, 내가 단언하건대 나가사와는 책을 제대로 읽지 않는 인간이다. 본인은 진짜 진주를 옆에 달고 다니지만(여자친구인 하쓰미, 기숙사 후배인 와타나베), 그것 역시 ‘척’을 위한 또 하나의 장식품일 뿐이다. 결국 ‘왕관’을 쓰지 못한 책의 비(非)상속자이기에 명품을 걸치고 다니나 비루한 삶을 산다.
고등학교 삼 년의 생활을 담아, 학종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독서의 ‘왕관’을 써야 한다. 그 길이 불편하고, 지옥의 행군이라도 본질을 향해 뚫고 가라. 진리는 무겁지만 평생의 삶을 지지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삼독자는 그 자체로 위대한 상속자다.
치장에 상관없이 고귀한 삶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