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로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 관심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말이 무엇인가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것이다
나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때 ‘다정함’이라는 말이 인간 태도의 정석(定石)처럼, 우리를 매료시킨 적이 있었다. 친하다는 건지, 정중하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둘의 경계 사이 어디에 붙어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한 관계. 딱 지금의 현대인이 원하는, 부담스럽지 않은 친밀함의 정도. 원만한 사회 구성을 위해 필요로 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지칭이다.
나쁘지 않다. 후하게 말하면 괜찮다. 하지만 최고는 아니다. 다정함은 보이는 부드러운 태도로 거친 본래의 마음을 위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속도 거친데, 겉도 거친 것이 최악이다. 거칠면 주변을 장악하며 모든 존재가 결국 살 수 없도록 조이기 때문이다. 가장 적합한 예는 ‘침략’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런 사람들에 대해 경계할 수 있다. 자신을 지키며, 끊임없이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것을 위한 다양한 감각과 경험치를 갖고 있다. 문제는 부드러운 겉으로 거친 속을 속이는 경우다. 오랫동안 곁에 있었으나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위험성에 대해 내가 지각할 수 없게 된다면. 그래서 나의 자아를 위협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핵폭탄, 한 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짚고 가야 할 점은 속도 부드럽고, 겉도 부드러운 인간은 단언하건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당초 인간의 본성으로 최고는 없다. 하지만 최고가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은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최고 바로 밑, 인간으로서의 최선의 모습이라고 한다. 마음 속에서는 끊임없이 악한 나가 꿈틀거리지만, 침략하고자 하는 나 자신과 항상 전쟁하며, 그 자아를 파괴하여 결국 보드라운 모습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려면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을 공격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자애로운 자아’라고 부른다. 동양에서는 이런 사람을 흔히 ‘군자’라고 한다.
그것은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은 신사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마에까와 다다시는,
“나는 말이지요, 겉모양은 ‘품행 단정’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은 그만큼 망상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겁니다.”
라고도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사람이야말로 신용해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미우라 아야꼬, ‘길은 여기에’ 중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인간은 ‘다정함’의 겉모습으로 속의 ‘폭력’을 위장하는 인간이다. 특별히 학생은 고등학교 삼 년의 생활 동안 이것에 대한 안목을 기를 필요가 있다. 온갖 지식을 끌어모아, 움켜쥐고, 그것의 정수를 향해 더듬어 ‘자애로운 인간’과 거리가 먼 이런 인간을 경계하고 구별해야 한다. 겉과 속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악’으로 무장된 사람은 빨리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학교 ‘안’에서는 이런 인간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학교가 매일 같이 전쟁터를 방불케 할 것이므로, 이런 인간은 반드시 위장하게 되어 있다. 다정한 태도로, 달콤한 말로, 실로 다양한 통로로. 자신의 악취를 감추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칠할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가 가까이해도 좋은 사람은
분명 고개를 숙이고 있을 것이다.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이 많은 인간을 비유하는 말이 아니다. 지식을 자랑하는 자를 보라. 고개가 들려 있을 뿐만 아니라 목조차도 뻣뻣하다. 그에 반해 ‘자애로운 자아’를 지닌 사람은 끊임없이 본인을 성찰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자애(慈愛)’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사전적으로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아랫사람은 사회적 위치가 아니라, 자신보다 나이나 학식이 부족한 사람일 터이다. 그런 사람들한테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헌신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익은 벼는 고개를 숙여 주변을 살펴야 한다. 본인만 익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들판은 애당초 수확을 할 수 있는 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께 익어가야 한다는 소명으로, ‘익지 않은’ 나 자신과 싸우며, ‘익지 않은’ 타인에 대해 돌봐야 한다. 이것이 모름지기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다. 학생들은 키가 성장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면을 바르게 키워나가야 하기 위해 공동체 공간인 학교에 다닌다. 그러니까 키와 몸무게는 집에서도 개인적으로 키울 수가 있다. 하지만 ‘자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논’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맞다. 학교에는 온갖 치장된 인간들이 득실거린다. 그렇게 보면 절대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자신의 잘남을 선전하기 위해, 자신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짓밟는 인간들로 득실거린다. 문제는 이들의 ‘악’을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이다. 그렇기에 그들과 같은 배를 타고, 그저 잔잔한 호수를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로 만든다. 오로지 그들만의 쾌락을 위해서.
인간은 이것에 맞서야 한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 세상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지식을 키우고, 이것에 대응하기 위해 용기를 키운다. 이 모든 게 학교생활이다. 애당초 ‘생활기록부’에 들어가는 ‘생활’은 ‘나’ 개인의 삶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이다. 당장은 거침이 소멸되지 않는다고 해도 의기소침해지면 안 된다. 계속되는 도전이 담기면 된다. 학생은 그렇기에 학생이다. 그대는 홀로 뜬 ‘스타’가 아니라, 밤하늘에 수놓아진 하나의 ‘별’이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