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성실’이 지식과 만날 때 ‘쓴다’

- 나의 ‘머리’를 쓰며 공부한다는 것

by 리라

공부를 한다는 것은 ‘머리’를 쓰는 것이다. 많은 학생은 공부의 시작을 강의 ‘듣기’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타자 중심적 언어를 바로 이해할 수 없기에 결국은 무작정 ‘손’ 쓰기부터 한다. 타자의 말하기 속도와 흐름을 무작정 따라가기 때문에 ‘필기’를 하는 것은 거의 단순노동에 가깝다. 능동적인 학생은 손 쓰기와 머리 쓰기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겠으나, 대부분은 손 쓰기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나의 머리를 쓴 ‘이전 행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머리가 먼저 움직이고, 그다음에 손이 움직여야 한다. 즉 나의 사고(思考)가 시작되면, 그것에 의해 필기가 따라오는 것이다. 마치 키우는 강아지를 산책시킬 때, 주인이 신호를 보내면, 강아지가 알아듣고 준비하는 것과 같다. 산책 과정에서도 주인이 목줄을 잡고 강아지를 이끌어간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거꾸로 된다면? 강아지가 주인에게 신호를 보내고, 강아지가 주인을 끌어당기며 산책하는 꼴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학생이 이렇게 살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겨울 방학 기간은 이런 기행(奇行)이 더욱 심하다. 문제는 학습의 주인이 이런 끌려다니기에 의해 학업이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무기력해진다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 열심히 돈을 쓰나, 아이의 머리 쓰는 행위가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아이의 손만 쓰며, 학원에서 손 근육만 발달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머리를 쓰고 있는지 자각할 수 있을까. 일단 어떤 개념을 혼자 맞닥트려야 한다.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등교하여 수업을 듣기 전에 이러한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흔히 ‘예습’이라고 한다. 풀어서 설명하면, 무엇을 배우는지 미리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몰랐는지 인지해야 한다. 이것이 머리를 쓰는 행위이다. 공부는 철저히 ‘나 중심’적 회로에서 시작된다. 내가 알고 모르는 것은 타인의 것과 다르다. 이것을 미리 파악하는 것이 공부다. 그러니까 능동적으로 책을 펴서 무엇에 대해 배울지 미리 확인하며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었던 옛 지식을 대응하고, 새로운 것을 덧대어 확장한다. 정리하면,


가 접한 새로운 개념적 지식에 대하여

그동안 가 몰랐던 것이 무엇인지,

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게 특별히 유용할지 생각하고

추가로 가 더 알고 싶은 것을 파악하여 탐구하는 것

이것에 대한 기록이 대입 학종의 핵심

과목별 세부능력 특기사항’이다.


실제 수업도 이러한 흐름을 따라간다. 도입 부분에서 이전에 배웠던 것을 복습하고, 본시 학습에서 새로운 개념에 대해 소개한다. 공부는 본시 학습에서 배울 새로운 개념에 대해 본인이 먼저 ‘지식의 필요성’을 능동적으로 인식해야 흥미롭게 이루어진다. 인간의 권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유’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돈이 아무리 많다 한들, 타인의 허락을 받고 이것을 누려야 한다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끊임없이 ‘자기 결정권’, 즉 ‘자유’를 자연스럽게 행사하고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뭘 배울지 정말 궁금하다”는 지적 호기심을 스스로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공부는 이러한 생각이 습관이 되어 계속 행해져야 개념이 지식이 되어 쌓여간다. ‘성실’은 학업을 일으키는 체력과 같다. 어쩌다 하루 책을 펼쳐보고, 끄적끄적 아는 바에 대해 적는다면 지식이 연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일어나려고 다리 근육을 세웠다가 주저앉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이는 기본적으로 성실할 수밖에 없다. 서울대학교가 수시를 ‘학종’ 전형으로만 뽑는 것은 생활기록부가 어느 날 갑자기 세워지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기록부는 사실 성실기록부라 할 만하다.
혹 모든 공부가 ‘성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정시인 수능 공부 역시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성실’은 ‘학교생활’의 성실이다. 흔히 말하는 ‘정시파’는 수능시험 한 번으로 대학에 가고자 하는 학생들이기에, 학교 일정에 충실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일례로 내가 담임한 3학년 학생 중 1년 개근은 딱 두 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학종을 지원하는 학생들이었다.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듣고, 질문, 발표 거리를 준비하는 학생들도 이들이었다. 나머지는 정시 공부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수업 시간에 딴 과목 공부를 하고, 출결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정시에 이런 요소들이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정시를 위해 자퇴하기도 한다.

오직 수능만 파는, 정시파 학생들은 힘겹다. 마치 물의 흐름에 역행하는 연어들처럼, 학교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생각처럼 내신이 안 나와서 학종을 쓸 수 없다고 말하는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마지막까지 학교생활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환한 조명을 비추고 있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오히려 방향키를 잃고 방황할 수 있다. 너의 내신이 다른 학생보다 부족해서 안 된다는 것 보다, 너의 성실이 지식과 맞물려 흥미롭게 흘러가지 않았기에 안 됐다고 성찰하는 것이 ‘학종’이다. 네가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네 삶의 빛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하루하루가 계속되는 가운데, 나의 배움이 도탑게 쓰여지고 쌓일 것이다. 무대에서 내려올 때까지 그것만으로도 이미 뿌듯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