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상에 잔뜩 차린 나의 욕심
릴라는 그 형편없는 인간들과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 했다. 그 집에 있는 것 중에서 물건 하나, 액자 하나 그들이 직접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중략) 그들은 아버지 대, 조부모 대, 고조부 대부터 그곳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을 것이고 수백 년 동안 자자손손 적어도 변호사나 의사나 교수 정도는 해왔을 집안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모두 그렇게 입고, 먹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밴 것이라고 했다. - 엘레나 페란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중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썼지만, 대부분 재미를 추구한 글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교실 앞 게시판에 떡하니 붙어 있던 ‘장래 희망’이 막연히 문학가였는데, 대학 다닐 무렵에는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다. 당시 유행하던 시트콤도 만들고, 더불어 돈도 벌고 싶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 학부모가 된 지금도 여전히 이런 어리석은 열망을 가진다. 아이와 함께 웃음꽃 피우면서, 한편으로 입시도 보란 듯이 성공시키고 싶다. 학부모의 진정한 명품은 어쩌면 아이의 ‘대학’ 치장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왜 모르겠는가. 그러기에 성적이 안 나오면 민망하고, 마음이 한층 더 무겁다. 입시가 ‘성공’ 대상이라면, 패배자가 되는 것도 전적으로 ‘나, 개인’의 문제일 텐데, 실상은 부모와 내가 하나의 세트로 묶여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가 아닌 2026년 이 시대에도 입시는 철저히 가문 중심적으로 귀결되며, ‘우리’라는 집단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입시에서 떨어지면, 내 부모도, 이 소식을 부모로부터 전해 듣는 할머니, 할아버지 집안도 명망이 기울게 된다. 아이가 위축되고,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금까지 학생의 성실과, 교사의 성실을 언급했다면 지금은 입시의 삼인방, 트라이앵글의 마지막 대상, 학부모의 ‘성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학부모도 성실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이한테 본이 되는 ‘모범적인 생활인’이 되라는 것이지, 아이의 성적을 사사건건 간섭하며, 그의 ‘학습 코치’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그건 지혜롭지 않다. 이를테면, 피아니스트 김정원 씨가 한 인터뷰 기사 내용 중에, 다른 아이들처럼 어머니의 헌신적 손길을 받아 이 자리까지 온 것이 아니라, 드라마 작가인 어머니가 치열하게 글을 쓰시는 것을 지켜보며, 삶에 대한 열정과 성실을 배웠다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이른바 아이를 감동하게 하는 부모의 성실이라 생각한다.
‘네포 베이비(Nepo Baby)’가 비단 정치인, 종교인, 연예인 같은 유명인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중산층 가정에서도 자신의 직업을, 아니면 집안에서 대물림되는 직업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 그러기 위해 부모는 정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며 자식을 뒷바라지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모의 성실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번 돈으로 자녀에게 돈을 쓰겠다는데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다만 예기치 않게 그것이 이상하게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아이를 하나의 목표로 지나치게 압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물질 만능에 사로잡혀 부모의 돈을 자신의 권력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자신감으로 말미암아 일종의 탐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밥상’에 대한 자랑에서도 발견한다. 요즈음 특별히 주부의 밥상을 찍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영상이 많다. 햇빛이 잘 들고 넓은 조리대가 있는 쾌적한 부엌에서 온갖 재료로 정성스럽게 차린 어머니의 밥상은 정말 멋지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많은 가정도 생각해야 한다. 어머니가 안 계신 가정도 있을뿐더러, 아프신 집도, 바쁘신 집도,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는 집도 있다. 많은 가정이 밖에서 보이지 않은 많은 고민거리를 안고 있다. 냉동식품이 아닌, 원재료인 식품을 가지고 정성 들여 자녀를 위해 요리를 할 수 있는 어머니는 여러 ‘여유’가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많은 어머니가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입시생을 둔 많은 어머니께서 일을 하신다. 아이가 다행히 학교에서 중식과 석식을 먹을 수 있기에 예전 같은 도시락에 대한 부담과 고민도 덜었다.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성실히 사시는 것만으로도 입시생 자녀는 감동할 수 있다. 내가 떡을 썰 테니, 너는 옆에서 글을 써 보라는 한석봉 어머니는 부담스럽다. 내가 밥상을 한껏 차릴 테니 너도 이것을 먹고 성적 향상을 꾀해보라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모든 걸 수수하게 갖고 갈 수 있는 부모의 ‘절제’의 자세가 필요하다. 집에서 하는 요리에 비해 학교 급식이 형편없다는 둥, 학원에서 선행을 다 했는데, 수업에서 얻을 게 뭐가 있느냐는 둥, 비싼 돈을 주고 컨설팅했는데, 학교에서 상담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둥, 더 나아가 우리 집이 몇십억인데, 내가 어느 자리에 있는데,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라는 말이 아이에겐 약이 아닌, 그저 독약임을 알아야 한다.
얼마 전, 아이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가, 직장용 정장 바지를 사고 싶어 두세 가게에 들어가 옷을 입어 보았다. 예산 범주에 맞는 정해진 브랜드가 있기에 가게를 헤매진 않았지만, 옷을 요사이 거의 사지 않기에 젊은 시절에 비해 옷을 택하는 안목이 많이 퇴색되어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아이 운동화만 사서 나오는 길에, 아이가 안에서는 하지 못했던 불만을 쏟아냈다. 사람들이 우릴 무시하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애당초 구매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며 엄마에게 무신경하게 응대했다는 것이다. 온라인에 비해 점포세를 내는 백화점 매장에 굳이 들어가는 사람은, 그 자체로 모두 구매할 수 있는 손님으로 인식하며 서비스해야 한다는 아이의 발언을 묵묵히 들으며 나는 그의 마음을 달랬다. 비록 유행하는 옷차림이 아닌, 수수한 외모의 나이지만 나는 내면의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 절대 그것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부모는 아이의 마음에 ‘허세’를 가르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은 모두 한정된 삶을 사는 존재이다. 그저 깨끗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안성기 씨가 아이에게 전한 ‘착하게 살라’는 말이 모든 본질이다. 아이와 그의 주변에 본질을 떠난 다른 것에 대한 부담을 줄 필요가 없다. 입시는 절대 성공의 대상이 아니다. 고등학교 생활의 결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런 면에서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 내면을 다듬으며 단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밥상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아이보다 세상에 대한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전략)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착해서 새과슨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자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후략)
- 백석, ‘선우사(膳友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