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입시는 기계적 인간을 키우기 위함인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처럼 각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은 작고 하얗다(순수하다). 이들은 어느 환경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그 존재가 눈덩이처럼 달라진다. 하늘에서 내릴 때는 모두 같았지만, 빚어진 눈은 같지 않다. 우뚝 선 눈사람이 될 수 있고, 이글루를 만드는 벽돌이 될 수도 있지만 아무런 존재감 없이 차 바퀴에 흩어질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작고 순수한 존재를 잘 키우고 싶은 건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이것은 비단 한 가정의 바람을 넘어선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사랑과 정성의 손길이 다방 면에서 섬세하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키우다’에 있다. 눈송이를 단단하면서도 의미 있게 일으켜야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교육은 학생들을 단단하면서도 의미있게 일으킬 수 있는 체제로 이루어져 있는가? 내가 볼 때, 한국의 교육 체계는 불필요한 소모적 경쟁을 부추긴다. 마치 서바이벌 게임처럼. 내가 좋은 성적을 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쟁자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았느냐, 그것도 나만 우뚝 서 있는 최고의 점수인가가 중요하다. 널리 알려진 우스개 일화 중에 초등학생 아이가 “엄마 저 오늘 100점 받았어요.” 라고 하니까 엄마 대답이 “100점 받은 아이가 몇 명이니?” 라는 것이 있다. 한국에서만 가능하고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이다. 아이가 최고의 완벽한 점수를 받았다 해도 그 성과에 대해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기행은 잘못된 대학 입시 때문이다. 12년의 학교 교육 성과를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치르게 하고, 그 시험의 형태도 정해진 짧은 시간 속에서 5지 선다형으로 선택하게 하며, 대학의 서열이 소위 정시의 지원군(가나다 군) 장판지처럼 순서화되어 있는 입시 말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극한의 고통을 맛보게 한다. 시험 당일, 긴 시간의 컨디션 조절이 애당초 부담스럽고, 답이 한 개로 정해져 있는데 문제는 나날이 비열해져 답 고르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하며, 정해져 있는 하나의 정답도 왜 고르지 못하냐는 자기 비하감마저 부여하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비극이 고기 등급을 매기듯이 사람을 상품화하며 마치 합리적으로 평가했다는 듯이 오랫동안 자행됐다는 사실이다. 1994년 처음 시행된 수능이라는 대학 입시는 그간 사람을 그 자체인 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점수화하여 대학에 배치하기 위한 대상으로 취급했다.
잘못된 입시 설계는 잘못된 학교 교육으로 이어진다. 12년의 공교육은 불안과 초조 나아가 공포심을 키우게 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12년의 기간 중 대학 입학에 가장 근접해 있는 고등학생의 3년을 살펴보면, 일 년의 학사 일정 중 굵은 뼈대를 이루는 것은 학교 내신 시험(총 4회의 지필평가)이고, 현 고1(2028 입시 대상자) 학생들에게 상대 평가(5등급제)로 줄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기존의 상대 평가인 9등급제가 고교 학점제가 도입한 고1 학생 때부터 절대 평가 체제가 도입될 수 있다는 기대감과 열망이 있었지만, 결국 상대 평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저 5등급제로 축소되었다. 오히려 선배 학년보다 상대 평가 과목이 3학년 2학기까지 유효하게 남아있을 수 있다는 불편한 전망과 함께. 또한 기존의 4%인 1등급에서 10%로 1등급 숫자가 늘어나면서, 여기에도 속하지 못하면 서울의 주요 대학에 진입하지 못한다는 극도의 불안감마저 팽배해졌다. 10% 안에 내가 설마 못 들겠는가. 4%에 비해 해 볼만하다고 생각하다가도, 많은 과목을 관리하다 보면, 11%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등급을 줄이다 보니, 2등급이 누적 34%까지 해당이 된다. 그러니 9등급제에서 괜찮은 등급인 2등급도 5등급제에서는 대입 하늘에 날벼락 같은 등급이 되어 버렸다.
이쯤에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대학 입시가 점잖게 표현해서, 왜 이렇게 개떡 같은지 그 이유에 대해서 매우 궁금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는지 고심해야 한다. 한석봉 어머니처럼 대한민국 부모들이 유독 교육열이 높다고 할 수 있지만 혹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극단적인 대결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아이가 열심히 하고, 그것을 인정받아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며, 꿋꿋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를 성적의 잣대에 의해 조이고, 괴롭히기 위해 공부를 시키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좁은 국토에서 한정된 대학을 두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가려고 열과 성을 다하다 보니, 불가피한 경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지금의 5지 선다형 시험 형태로 사람을 압박하고 줄 세우는 방안을 절대 합리화하면 안된다.
이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뚫고 들어가려면 현재의 대학 입시 시험인 수능이 기괴하다는 것에 대해 먼저 인정해야 한다. 정해진 시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암기 위주의 학력고사의 대안으로 나온 수능이 효율성 때문에 5지 선다형 객관식으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AI시대인 것이다. 소위 무선 통신의 방식으로, 삐삐가 통용되던 1990년대에 나온 수능의 방식을 지금까지 고집한 것은 무성의를 넘어서, 한 국가의 교육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 죄 없는 이 나라에 태어난 아이들을 좌절하게 하기 위한 고도의 계략이다. 가장 최근의 수능 문제에서 문제화된 국어영역의 칸트 제시문의 17번은 철학 전공 교수로부터 5지 선다형에서 답을 고를 수 없다는 이의 제기를 받았음에도 정답을 고르는 데 문제없다는 것으로 평가원이 결론을 내렸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칸트에 대한 고도의 배경 지식이 있는 대학 교수도 제시문을 이해하는데 20분이 걸렸다는데, 철학 비전공 수험생 학생들이 그 제시문을 푸는데 걸려야 하는 이상적인 시간 배분이 얼마인지 아는가. 14번부터 17번까지 4문제가 걸려있는 이 제시문은 한 문제당 1분 40초를 기계적으로 계산할 때 6분 40초, 마지막 3점짜리 17번에 아무리 양보해도 10분 내로 제시문을 읽고 문제를 풀어야, 45문제를 80분 안에 답안지 마킹까지 완료하고, 가채점 점수까지 입력할 수 있다. 그러면서 평가원은 사교육으로 다져진 학생 간의 변별력을 위해 이렇게 출제할 수밖에 없다고 답변한다. 시간 부족 현상에 대해서는 국어영역이 애당초 제시문 글을 찬찬히 읽고 푸는 시험이 아님을 설명한다. 즉 제시문은 문제를 풀기 위한 근거이자 하나의 논리인 것이지, 우리가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사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수험생 입장에서는 칸트의 철학을 하나도 모른 채로 문제를 푼다. 칸트의 철학에 대해 깊이 알 필요도 없고, 주어진 제시문에 대해 비판할 필요도 없다. 탈출구를 숨겨 놓은 복잡한 미로에 던져진 작고 연약한 짐승이, 마치 목숨을 걸고 방 탈출하는 것처럼 근거의 열쇠를 찾아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이것이 기괴한 것이지 무엇이겠는가.
문제는 이러한 수능을 대입의 가장 공정한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라에서 주관하여 출제하고 채점하는 국가 수준의 수능 시험 문제를 전국의 모든 수험생이 똑같은 시간에 일제히 봐서, 그것의 백분위, 표준점수, 또는 대학 변환점수로 대학에 지원하는 것이 가장 공정한 평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정함이 기괴함을 이길 수 있는가. 이 공정함이 학생들의 공포심과 우울감 조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내 사랑하는 자녀의 기계화를 억누를 수 있는가. 인간은 AI를 만들 정도로 무궁무진한 잠재적 창의성을 지니고 있다. 필요에 따라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이지, AI가 될 필요가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지난 세월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얻은, 지금의 수능 국어영역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이다.